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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스 Aug 30. 2019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

 

면허를 딴 지 12년, 본격적으로 운전한 지 6년 정도 되었다. 남들은 스트레스 해소하기 위해 드라이브 간다는데 난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왜냐면 내게 ‘운전’은 말 그대로 스트레스 그 자체기 때문이다. 깜빡이 안 키고 갑자기 끼어드는 택시, 교차로에서 꼬리 물기 하는 승용차, 길거리에 함부로 담배 버리는 운전자들 그때마다 경적은 내 입이 된다.


 “미친놈들! 저런 인간들 운전면허 깡그리 회수해야 해.”

 우렁찬 목소리가 천장을 찌르는 게 (비록 내 머리 위 20cm 공간이지만) 차 안에서만큼은 내가 여포다. 물론 차 밖에서는 초선이지만...


 카시트에 앉아 그런 내 모습 보던 딸은 고개를 절레절레 돌린다.

 “애 앞에서 욕 좀 하지 마!”

 사모님 자리에 앉아있는 아내는 또 잔소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나! 뭔가 목소리가 권위적이다. 룸미러 보던 나는 심혈관이 좁아진다. 뜨겁게 달구어진 피가 권위에 항거하라고 요동친다.


 “그럼 자기가 한번 운전해봐... 세요!”

 소심하게 나는 말끝을 오므린다. 비수를 찌르는 아내의 날카로운 눈매로 나만의 ‘3초 천하’는 쉽게 너무도 쉽게 진압되어 버렸다.     


 

아내 입김에 펄럭이는 내 모습



 살다 보면 스트레스받을 때가 많다. 촬영장에서도 집에서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그럴 때마다 나는 보통 욕을 내뱉거나 세상 모르게 잠을 자거나 아니면 딴 행동 하면서 애써 잊으려고 노력한다. 먹힐 때도 있지만 문제는 안 먹힐 때가 많다는 거다. 머리라는 게 압력밥솥 같아서 한번 취사 버튼을 누르면 그때부터 김만 계속 모락모락 나더라.


 “그 자식 그때 이렇게 혼내줬어야 하는데.”

 “그때 그렇게 나이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는데.”

 A형이라서 그런가! 쿨 한 척하려 해도 ‘냉’할 뿐 ‘쉬크’해지지 않는다. 자꾸 머릿속에 영사기처럼 재생되는 게 전원을 끄지 않는 한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가 과연 잘못인가!’

 스트레스가 나쁘다고 생각했기에 스트레스 쌓이면 무조건 풀려했다. 여행도 다니고 템플 스테이도 신청하고 친구들과 하루 종일 잡담하면서 마음의 피로를 던져버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늘 느끼는 건, 아무리 풀어도 풀어도... 그 스트레스라는 건 절대 0이 되지 않더라. 아무리 0 인척 툴툴 털어내봐도 이미 피부와 마음 속에 노폐물처럼 쌓인 지 오래였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푸느냐!’ 에만 너무 집착하며 살았다. 이 정도 고생했으니 이만큼 보상해줘야지! 마치 수학공식 푸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생의 문제는 평범한 공식, 희한한 공식 다 대입해봐도 매번 풀리는 게 아니더라. 푸는 방식을 모를 때도 있었고 풀었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헛다리 짚은 경우도 허다했다


  요즘 드는 생각!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 보다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스트레스는 마냥 나쁜 게 아니더라. 내 경우에 스트레스는 곧  콤플렉스로 치환되었고 그 콤플렉스를 몇 번 겪다 보면 그걸 떨치기 위해 나는 조금씩 조금씩 진화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나는 한글을 전혀 모른 채(7살에 학교 들어가는 바람에)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글씨를 적으면 나는 그게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세모 닮은꼴! 막대기 닮은꼴! 칠판은 반구대 암각화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기에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선생님이 콩나물시루 같은 아이들 틈에서 하필 날 지목하셨다.

 "부모님 이름 써봐!"

 역시나 나는 칠판에 한 글자도 적을 수 없었다. 그걸 본 친구들은 손가락질하며 놀렸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콤플렉스가 생긴 거다.


 다행히도 나는 콤플렉스에 좌절하지 않았다. 날 보고 비웃는 친구들 때문에 오기가 생겨서였을까? 하루에 반나절 이상 책을 읽었고 결국 그해 2학기 때는 반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촬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매일 연기자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예전에는 무조건 내 의견이 맞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과정이 너무 쓰디쓰더라.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고 날 믿은 배우들에게 신망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매번 드라마 끝날 때마다 혼자 백서를 쓴다.

 

 ‘이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좀 더 지혜롭게 접근했어야 하는데...’


 물론 그렇다고 나 스스로가 확 바뀌는 것도, 단기간에 묘수가 더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면 어떤 건 꼭 지키고 어떤 건 양보해야 하는지 나만의 노하우를 얻게 된다.


쇠는 두들길수록 단단해지는 것처럼 어찌 보면 인간의 정신력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나중에 일할 때 또 힘들거나 비슷한 상황 생기면 그때 힘들었던 기억 떠올리면 ‘내가 그때도 이겨냈는데 이 정도는 껌이지!’ 이런 생각으로 버틸 수 있을 지도.     


김과장 촬영할 때 모습 (최고의 배우들과 만났다)

 


 타란튤라는 뼈가 우리처럼 안에 있는 내골격이 아니라 껍데기로 두르고 있는 외골격이다. 껍데기를 벗지 않으면 성장을 못하는데 이 과장을 우리는 보통 '탈피'라고 부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죽는 날까지 매일매일 우리는 탈피를 한다. 몸이 성장하려면 안에 있는 골격이 커져야 하듯, 마음이 성장하려면 갇혀있는 틀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라는 부르는 그 껍데기! 그 자체를 먼저 인정하고 그걸 극복해야만 마음이란 게 성장할 수 있지 아닐까?


 “애 앞에서 욕 좀 하지 마!”

 “알았어. 알았다고... 요”

 운전대 잡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탈피에 성공했다. 아내 눈빛을 보는 순간 목소리가 알프스 요들 처럼 떨려 나왔지만... 앞으로 차에 혼자 있을 때도 탈피에 성공할 수 있을지 한번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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