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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 노튼 Mar 15. 2019

우정에 대하여

영화 <좋은 친구들> 에세이


 나는 초등학교 때 친구가 아주 많았다. 나름 학교에서 유명인사였기에 애들은 나와 친해지고 싶어 했고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반 아이들은 나와 같이 등교하기 위해 몇 십분 전부터 우리 집에 와서 지각하는 나를 기다려주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며 사정이 변했다. 처음 보는 애들이 많이 생기자 내가 원래 유명인사였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매일 우리 집에서 나의 등교를 기다리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뜸해지기 시작했다. 아, 씨바. 우정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나는 남자끼리의 찐득한 의리, 우정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기쁠 때 같이 웃고, 서로의 잘못을 감싸주고, 시비를 거는 녀석이 있으면 같이 물씬 두들겨 패버리는 그런 친구 말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나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려 하는 일종의 강박이 있다. 구태여 말하지 않고 은근히 숨기며 넘어갈 법한 일들도 나는 말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말해서 받게 될 부정적 이미지보다 비겁한 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더 싫기 때문이다.

 

어릴 때 부터 동고동락 해 온 'Good Fellas' 지미 콘웨이(좌), 토미 드비토, 헨리 힐(우)

 모든 관계가 그렇듯 영원한 것은 없는 법. 한없이 가까웠던 친구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멀어지곤 한다. 이것은 슬픈 숙명의 콤플렉스이다. 나의 약은 속사정을 풀어보자면, 내 친구들은 나의 치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친구와 멀어지는 것이 한편으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쁘게 사이가 틀어져버린 사람이 미래에 나를 어떻게 공격해올지, 어떤 나쁜 소문을 퍼뜨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강박적으로 행동하는 나도 이런 약아빠진 생각이 이따금씩 들곤 하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그렇게 하나둘씩 멀어지는 관계들을 이따금씩 생각해보면 미치도록 외로웠던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사나이들의 의리가 진짜 있기는 한 걸까. 내 성격이 모난 것일까. 아니면 나의 지적 수준에 비해 당신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일까. 당신은 원래 우정이라곤 없는 약아빠진 녀석이어서일까.


 <좋은 친구들>의 헨리와 토미, 지미는 내가 어릴 적부터 바라 왔던 이상적인 친구들이다. 어릴 적부터 만나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같이 달려가는 친구들.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감싸주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주인공 헨리와 지미는 대부 역할을 하는 폴리의 의뢰를 받고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을 죽도록 두들겨 팬다. 그런데 하필 그 피해자의 누이가 FBI의 타이퍼로 일하고 있던 터라 지미와 헨리는 바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는다. 서로를 가족이라고 부르던 토미와 지미, 폴리는 헨리가 막상 체포되자 헨리의 가족을 돌봐주지 않는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헨리의 가족은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헨리는 아내가 감옥으로 밀반입한 마약을 팔아 근근이 생활한다.

 헨리는 가석방을 받아 5년 만에 출옥하지만, 친구들에게 헨리는 부담스러운 애물단지처럼 여겨진다. 자잘한 마약 판매업을 고리로 겨우 겨우 이어지던 그들의 관계는 토미가 마피아에게 살해당한 이후 끊어지고 만다.

 마약 판매 외에도 여러 합법 사업장을 운영하던 지미는 마약 판매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헨리가 그를 밀고할까 두려워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헨리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위협들이 점점 다가옴을 느끼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때마침 마약단속반은 헨리를 체포해 주변 사람들을 밀고하면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플리바게닝을 제시한다. 헨리는 자신을 죽이려는 친구를 배신하거나 그에게 죽거나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고민하던 헨리는 결국 폴리와 지미 모두를 경찰에 밀고하고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경찰에게 새로운 신분을 받아 잠적한다.


 영화는 ‘우정이란 없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사람들은 흔히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친구를 비교하며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친구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서로의 처지나 형편이 비슷할 때에만 친구가 될 수 있다. 한쪽이 다른 쪽에게 동점심을 갖게 되면 그 관계는 시시해지고 만다. 도움을 주는 쪽은 주는 쪽대로 기대심을 갖게 되고, 받는 쪽은 받는 대로 은근한 굴욕감을 받고 도리어 복수심까지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동물이다. 우정이라는 끈끈하고 숭고한 감정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만 생긴다. 가식과 위선의 가면을 벗은 인간의 맨 얼굴은 사실 한 없이 이기적이었다.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라는 노래가 있다. 현재의 어긋난 관계를 붙잡고 노력 따위를 한다고 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멜랑콜리한 감정에 취해 그저 목놓아 아, 옛날이여를 울부짖는 것뿐. 시간은 왜 이리도 야속하고, 우리는 왜 이리도 외롭게 태어났는가.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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