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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 노튼 Jul 21. 2019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

내면의 혼란으로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시시껍절하다. 반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치명적이고 섹시하다. 나의 21살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던 시기였다. 주위엔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만한 사람이 없었고, 세상은 부조리 투성이었다. 부조리를 외면하다 못해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바보들의 인생이 혐오스러웠다. 이때의 나는 하루에 몇 번씩이나 몸이 재처럼 사르르 녹아 바람에 휘날려 영원히 소멸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손목을 긋는다거나 하는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이 영화의 대사를 빌려오자면 그저 도둑질을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물론 지갑에 돈을 쟁여놓은 채로 말이다.



이 시기의 나는 분명 어떤 정신병에 걸린 것 같았다. 신경증인지. 조울증인지, 성격장애인지, 경계성 인격장애인지는 몰라도 항상 죽음에 가까워지려 노력했으니까.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삶을 동경했다. 인생이 덧없고 짧은 것이라면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 훨씬 멋있지 않은가. 나는 보니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이 나에게 거는 약간의 기대마저도 커다란 짐처럼 느껴졌다.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의 어쭙잖은 기대를 깨부술 때마다 짜릿함은 더 커졌다. 딱히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기에 너무 멍청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멍청해서 위선을 떨며 가식적인 웃음을 파는 거짓말쟁이를 좋은 사람이라 착각했고, 교회에 헌금을 바치며 있지도 않은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며,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해도 내면의 공허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채워 넣으려고 해도 구멍은 커져만 갔다. 오히려 죄책감과 수치심이란 녀석들이 새로이 나타나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나는 질서와 규칙과 윤리를 배척하고 자유를 택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충동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도 왜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우울감과 내면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여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구석진 곳으로 피해 다녔고, 성욕은 극도로 불규칙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말투엔 살기 어린 비난과 짜증이 베였다. 여자친구가 사랑했던 나의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눈동자는 텅 비어져 갔다.



그렇게 몇 년을 방황한 나는 문학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나는 원래 문학을 싫어했다. 세세한 묘사들을 상상하는 게 피곤할뿐더러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300페이지 씩이나 되는 글을 몇 시간 동안 읽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우주’라고 부르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부모 사이나 연인 사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당신이 될 수 없다는, 좁힐 수 없는 각자만의 우주가 있다는 뜻이다. 각자의 우주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의 수만 가지 경험을 완전히 알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대강 이런 기분이겠거니 하고 이해하는 척할 뿐이다.


그래서 삶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자유의지를 얻은 시점부터 지금까지 영겁의 시간 동안 내면의 선과 악에 대해 고민해왔다. 예수가 그러했고, 소크라테스가 그러했고, 노자가 그러했다. 위대한 철학자들과 이름 없는 선조들은 후손들을 위해 그들이 발견해낸 진리를 신화와 종교, 시와 문학, 속담으로 만들어 전승시켰다. 그냥 알려주면 되는걸 왜 변태처럼 비유를 통해 남겨놓느냐고? 선조들은 답한다. 말해주면 네 머리로 이해할 수나 있느냐.


인류가 쌓아놓은 방대한 지혜에 비해 우리의 우주는 너무도 제한적이고 좁아터진 곳이다. 소크라테스가 환생해 칠판 앞에 서서 진리에 대한 족집게 과외를 해주더라도 우리는 늘상 하던 대로 이해하는 척 고개만 끄덕거릴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선과 악, 질서와 혼돈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을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경험시켜주고 이해시켜준다. 우리의 작고 작은 우주 속으로 새로운 경험 보따리를 푸욱 찔러 넣어준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카프카,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솔제니친, 하루키, 마광수, 재키와이와 함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알아갔다.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이름 모를 정신병은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리사는 데이지를 자살로 내몬다. 그리고 절규한다.

“왜 사람들은 내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지? 내가 창녀이고, 부모님은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거야?”

수잔나는 대답한다.

“왜냐면 너는 이미 죽었으니까. 너의 심장은 차가워. 너는 여기서만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계속 돌아오는 거잖아.”



리사의 삶은 너무도 섹시하다. 자유롭고 파멸적이다. 인간의 유한한 운명을 비웃는 듯한 모습을 보면 그 누구든 한 번쯤 빠져들지 않기 힘들다. 하지만 수잔나는 리사가 죽은 데이지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는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의 내면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악을 없앨 수는 없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선을 없앨 수는 없다. 리사의 잔혹한 모습을 본 수잔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내면의 선을 떠올린다. 의사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고 부르는 리사는 사실 세상의 부조리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과 주변을 열심히 망치는 무책임한 도피자일 뿐이었다. 반면 수잔나는 탈출한 정신병원으로 돌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터 놓기 시작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양향성이란 단어의 뜻을 수잔나는 ‘I don’t care’라고 하고, 윅 박사는 ‘perfect’이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윅 박사와 혼돈에 휩싸인 수잔나의 시각 차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수잔나는 세상엔 선이 있는 만큼 악도 있으니 어찌 되든 상관없다, 될 대로 돼라 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현실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쿨한 척하지만 사실은 자포자기의 겁쟁이 같은 태도이다.


리사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파괴적 본능이고 혼돈이다. 인생의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사랑에 빠져야 하는 마성의 여인이다.


윅 박사는 선과 악, 질서와 자유의 균형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리사로 의인화된 파괴적 욕구를 없애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리사처럼 살아가서도 안된다. 자신을 내면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인생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리사에게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은 그녀를 보듬고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물론 부처와 같은 성인에 반열에 오르는 것은 어렵다. 어쩌면 평생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치-정직, 사랑, 성실, 인내, 겸손-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런 생각과 감정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성찰하자. 내 안에 있는 리사와 대화를 나누자. 리사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발전시켜줄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잔나처럼 용기 있게 병원 밖을 나서자. 그때서야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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