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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 노튼 Nov 10. 2019

영화 <셀마>

그럼에도 세상은 진보한다

2019년 11월 9일의 일기

그럼에도 세상은 진보한다


한가한 토요일 낮, 유튜브를 열고 추천 영상을 재생했다. 정시 확대를 주제로 한 100분 토론 영상이었다.

 좆반고 수시충들


정시 확대를 찬성하는 학생이 단 댓글이었다.

강남애들이 공부를 더 잘하고 열심히 하는데 왜 지방충들에게 양보를 해야 하냐, 인강이 잘돼 있으니 지방에서도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 수시충 일반고 애들은 머가리가 텅텅 비었다며 열을 내고 있었다.


뉴스 페이지에서는 모 정당 영입 인재의 발언이 화제였다. 65살이 돼서 기초연금을 받으면 인생을 잘못 산 것이란다.





이날 오후 2시 여의도에서는 노동자 대회가 열렸다. 대법원에서 정규직화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협받는 톨게이트 노동자, 대규모 구조조정의 위험에 놓인 전국의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을 외치며 투쟁의 목소리를 높였다.




집으로 돌아와 티비를 켰다. MBN에서 <셀마>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셀마는 미국 남부 앨라바마 주의  도시로,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자행됐던 곳이다. 마틴 루터 킹은 셀마의 흑인들이 위협과 차별로 인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셀마에서 시위를 진행한다.


시위를 진행하다 수감된 킹은 동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평등이 뭘까?

저들이 식당에 갈 수 있게 된들 식당에서 햄버거를 시킬 돈이 없으면 어떡하지?

학교에 갈 수 있게 된들 글을 읽지 못하면 어떡하지?

몇 대에 걸쳐 패배하는 것을 학습한 이들이 저들에 게 맞서 싸울 힘과 의지가 있을까?”


동지는 대답한다.

벽돌을 쌓는 거지 하나씩 하나씩



공부를 시키기 위해 부모와 선생들이 남발했던 거짓말을 아이들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괴물이 되었다. 약자에게 칼을 뱉는 그들의 시야는 얼마나 좁으며, 그들의 영혼은 얼마나 타락하였는가.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이 나라에는 정녕 올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노년층이 아니라 우리 젊은 세대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걸 느낄 때 더욱 그렇다. 품위, 교향, 기품, 가치와 도덕은 사라지고 남을 밟고 상처 주는 데만 혈안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불과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베충 격인) KKK단이 득실거리던 나라에서 흑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흑인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사회에서도 세상은 진보하길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것에서 역사를 진보시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자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세상의 부당함과 맞설 용기를 주옵소서.


검둥이 노예는 초강대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역사의 진보를 의심치 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느냐

먼저 일어선 자의 삶은 괴롭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외치던 전태일은 그렇게 죽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역사는 진보한다. 그것이 역사가 인간들이게 주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임무는 벽돌을 쌓는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한낱 인간의 존재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갈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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