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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현 Aug 04. 2021

언론인의 태도는 정치적이어야 한다.

영화 <더 포스트>와 랑케, 오웰의 관점으로 본 언론인

-언론의 생리-


영화 <더 포스트>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언론은 역사의 초안이다."


동시대에 살아 숨 쉬는 사건은 곧장 과거의 역사가 된다. 언론이 동시대의 사건을 조명하는 행위가 역사가의 생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더 포스트>의 중심 사건은 '펜타곤 페이퍼'의 보도다.(정식 문서 명칭은 '미국-베트남 관계, 1945-1967'라고 한다.) 펜타곤 페이퍼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의 원인인 '통킹만 사건'(1946년 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를 선제공격하였다고 알려진 사건, <네이버 사전>)을 조작했다는 내용을 담은 비밀문서다.


뉴욕 타임스의 첫 보도로 시작해 워싱턴 포스트가 세상에 공개한다. 당시 세상을 뒤흔들었던 이 사건은 50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언론의 공개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여전히 은폐되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 조작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 사실을 폭로한 사건 자체도 역사가 되었다. 즉, 1950년대의 사건이 미국 정부의 기획임은 물론,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4명의 대통령이 모두 이 사실을 은폐해 왔음이 드러났다. 전자는 과거 속에서 마무리된 사건이고 후자는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양자를 나눈 까닭은 전자에 비해 후자가 더 보도의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죽은 권력은 보복할 힘이 없지만 살아 있는 권력은 도전에 즉시 응수한다. 전자의 성격만을 지닌 보도였다면, 보도에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후자의 성격까지 포함했기 때문에 워싱턴 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고 공개하기 직전까지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아야만 했다. 살아 숨 쉬는 사건이 역사로 남기 위해선 정치권력의 압박을 견뎌야 한다.


있는 사실만을 보도하려는 행위에 정치적인 견제가 들어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객관적인 서술-


역사가 랑케는 <1494년부터 1514년까지 라틴족과 게르만족의 역사>에서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이려 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후대의 많은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객관적인 사건 서술을 집착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랑케와 같은 관점이 큰 힘을 지니지는 않지만, 종종 '객관적인 관점'을 지키려는 이들이 많다. '있었던 그대로'가 주는 인상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서술은 어떤 배경이나 편견에 오염되지 않아 '진리'와 같은 모습을 가진다. 본성상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는 치우치지 않은 균형을 선호하고 노력한다.


그러나 매력은 쉽게 가질 수 없는 대상이 자아내는 힘이다. 인간이 항상 주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인 한, 객관적인 사건 서술은 불가능하다.


-비판-


유시민은 랑케의 관점을 두 가지 지점에서 비판한다.


첫째는 무지無知다. 인간의 정신과 문자 텍스트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역사가가 객관적인 사건 서술을 위해 작성하는 그 사건은 역사가의 선택이 들어간다. 역사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반영된 것이다. 그 기준은 역사가의 시대적 배경, 물질적 조건, 문화적 맥락 등이 섞여있다. 이러한 여건을 초월한 사건 서술은 있을 수 없다.

또한, 랑케가 역사를 전달하는 매체는 문자다. 문자는 '있었던 그대로'의 사건을 담기엔 생략하는 것이 많다.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만 하더라도 문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치적 이점이다. 객관적인 서술이란 미명 아래 작업한 결과물들은 '사건을 선택한 이유', '사건의 해석' 등을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결과, 현실에 휘말릴 여러 정치적 논란에서 도망갈 수 있다


-역사와 정치적인 것-


주목할 지점은 두 번째 비판이다. 역사가는 과거를 길어 올리는 존재인 한편, 동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다. 역사가의 관점은 그 시대의 이념들로 주조된다. 따라서 어떤 이념이 자신을 특정 역사로 향하게 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즉, 특정 과거가 현재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할 의무가 있다.


사회는 항상 그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현상을 유지할 것인지, 바꿀 것인지를 두고 다툰다. 인간은 이러한 갈등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더 바람직한 선택을 추구한다. 이러한 행위는 '정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는 항상 선택이 동반된다.


역사가 역시 동시대의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정치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정 이념은 정치적인 선택을 일으키고 관점을 구분한다. 그 과정에서 선택되지 못한 관점들의 비판을 받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정치적 논란을 원천 차단하는 서술은 불가능할뿐더러 의미도 가치도 없다. 동시대의 사회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케의 관점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다음 물음이 따라온다. 역사가가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의 의미를 말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기록은 흩어져 사라진 사건을 텍스트의 힘을 빌려 억지로 잡아두는 작업이다. 사라져야 마땅한 것을 남기는 까닭은 현세와 후세에도 나름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기록 과정과 기록물 보관에 소요되는 현재의 자원만 생각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미래 예측에 도움이 된다는 점, 교훈을 얻는다는 점이 있다. '사라진 문명을 찾아 건져 올리는 행위' 그 자체가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도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가치를 부여하므로, 현재의 이념,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료의 모든 정보가 역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선택에는 항상 예외가 생긴다. 과거의 역사가가 버린 정보가 현재에 들어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물론, 인간이 꼭 의미 있는 일만 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하나의 '유희'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각종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작업 과정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유희로 보긴 어렵다.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발굴하면서 큰 희열을 느낀 듯 하지만, 그와 같은 취미를 가진 이가 얼마나 될까.)


-객관적 서술의 정당성-


언론이 역사의 초안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역사가의 태도와 언론인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선택하는 동시대의 사건은 기록이 되어 역사의 첫 장이 된다. 특정 사건을 조명하고 해석하는 행위는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인 선택이 동반된다. 그리하여 <더 포스트>가 보여 주듯이, 기록엔 비판과 견제가 따라오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비판과 견제를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존재의 사활을 걸 수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객관적 서술'의 정치적인 이점은 살아있는 권력의 감시를 피하는데 용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의 조선 역사가들은 랑케를 차용해 '실증주의 역사관'을 근거로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민족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례가 보여주듯이 객관적 서술의 정치적 이점은 그것이 구호로 쓰일 때뿐이다. 조선의 역사가들은 '있었던 그대로'라는 구호 아래 민족의 관점으로 역사를 작성했다. 이때만이 랑케의 관점이 정당화될 수 있다.


-언론인의 태도-


앞선 내용들을 정리하면 언론인과 역사가의 태도는 거의 비슷하고 어떤 서술이든 정치적인 비판과 논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사건과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일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여기서 예술은 '글 쓰는 행위' 전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정치적이라는 의미를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라고 이해한다.


모든 글이 정치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기사 역시 그렇다. 객관적인 보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사의 강령, 데스크의 지침, 기자의 관점에 의해 특정 사건이 선택되고 해석된다. 단신보도도 마찬가지다. 그 사건이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재빨리 기사로 남은 것이다.


한 가지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정치적이라고 해서 사실 왜곡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선택과 판단은 사실에 기반한다. 왜곡은 실수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한편, 따라오는 이익이 존재할 때 발생한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위하는 것은 정파적인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은 정파성에 의한 왜곡을 경계하되, 정치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기록은 기본적으로 독자를 전제한 행위이며 설득하는 힘을 가진다. 설득에 관한 반응은 수용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거부 중에 하나로 나타난다. 비판과 견제는 거부에 해당하는 반응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기질상 언론인은 논쟁을 부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존재가 위협되어 정치적인 행위가 소극적이게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정치적인 것 자체를 원천 차단하려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불가능할뿐더러 언론인의 생리를 부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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