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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현 Jul 30. 2021

백신 예약 취소당한 날

법정스님 <무소유> 따라 하기

7월 30일. 매미도 지쳐 숨죽이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오죽할까. 지쳐서 잠이 깨버렸다. 피곤한 몸을 좌우로 굴려 남은 졸음을 쫓는다. 더 자고 싶지만, 여름이 방해할뿐더러 백신 맞는 날이다. 서둘러 의원을 다녀와야 한다.


백신은 나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정도 직업도 없는 주제에 빨리 접종한들 무슨 소용일까 싶다. 생업을 이끄는 이들이 바쁜 틈을 타 백신을 노리는 모습도 양심에 찔렸다.




내 주변엔 귀인들이 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종종 살림을 챙겨준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한 몫한다. 접종 때만 막연히 기다리고 있던 내게 잔여백신 상황과 접종 의원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시했다. 카카오톡 그룹 채팅방의 장점인가 싶다. 친구의 선한 권유도 모른 척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화는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꼼꼼한 친구 두 놈이 전화를 걸어 친절을 베푸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내가 이유를 들어 마다하면 생사 앞에서 고상한 척하는 꼴불견으로 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7월 27일. 양심을 걷어차고 체면을 차려 의원 두 군데에 백신 예약을 해 두었다.




바로 다음 날인 7월 28일. 한 의원에서 연락이 왔다. 30일과 31일 중 접종일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31일은 여자 친구와 운동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어차피 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운동은 못하지만, 미안한 기색으로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30일 날 오전에 맞기로 결정했다. 조금이라도 더 쉬고 여자 친구를 모시려는 속셈이었다.


20분 거리를 자가용으로 이동했다. 백신을 맞으면 당일 샤워도 참아야 한다길래 절대 땀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도착한 의원엔 어르신들이 쉼터처럼 앉아계셨다. 그 뒤로 어두운 조명 아사람 하나 겨우 맞이할 카운터가 놓여있었다. 정겨우면서도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든 기록이 손으로 작성되었다. 방문록을 작성하면서 카운터 너머를 훔쳐보니, 예약 현황도 모두 수기였다. 요즘 시대엔 낯선 풍경이다.


잠깐 기다리고 보니, 내 이름이 예약되지 않았다고 한다. 31일도 확인하니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의원이랑 착각한 것은 아닐까 통화내역을 뒤졌다.


분명 나는 여기서 예약을 했다. 10시 20분에 전화를 받고 10시 30분, 11시에 각각 친구와 여자 친구에게 관련 사실을 전화와 카카오톡으로 알렸다. 게다가 오후 5시에 다른 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와 그 예약까지 취소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응대자는 내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래도 예약 현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약은 나 없이 꽉 차 있었다. 응대자는 당황하며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잔여백신을 구하고자 함이었으나, 여력은 없었다. 나보고 8월 6일에나 다시 오란다.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 잘걸.', '여자 친구랑 약속은?', '내 시간.', '8월 8일에 입사시험인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냥 됐으니, 내가 연락하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물론 연락은 안 한다. 언제 또 20분 거리를 왕복하나. 어제 취소한 의원에 연락해 다시 예약을 했다. 체면 차리려 걷어찬 양심이 되려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도 화가 식지 않았다. 친구에게 전화해 투정을 부렸다. 실수한 응대자에겐 따지지 않고 혼자 속을 썩이는 게 미련한 건가 싶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제 권리 하나 찾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았다.


요즘 <무소유>를 재밌게 읽고 있다. 그래서인지 문득 법정 스님이 생각났다. 당신이라면, "내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넘기지 않았을까.


법정스님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나는 중생이라 그런 건 모르겠다. 속세에 결박된 이는 속세 따라 감정이 변한다. 그래 화가 바로 않았다.


그래도 애초에 내 의지로 취한 백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줬다. 예약자 명단엔 분명 나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나는 노동에서 자유롭고 열심히 운동하는 20대 취업준비생이기 때문이다. 백신은 분명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 사실에서 위안을 강제로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샀다. 오늘따라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 감정은 미련해서 물질 만으로도 다스려진다.


<무소유>의 정신은 내겐 너무 고급스럽다. 그래도 흉내라도 내면 광대가 양반 연기하듯, 잠시 그 노릇 할 수 있다. 별거 아닌 사건을 글로 남기는 것도 <무소유> 흉내다. 그래서인지 화가 누그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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