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주현 Sep 02. 2021

곁눈질 못하는 공정성

위로 분노하는 공정성, 아래로도 향해야 한다.

 '공정성' 논쟁이 뜨겁다. 정치권과 학계에서 뚜렷한 정의관을 내세우지 못한 틈을 타 주요 이슈로 비집고 올라왔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공정성'이 사회정의가 되기엔 무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정의는 되도록 일관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때에 따라 쉽게 바뀌는 기준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정성'은 공정하지 못하다.


'공정성'과 공정하다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고정된 개념이고 후자는 어떤 개념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속성, 성질이기 때문이다. 마치 여성과 여성스러움이 다르듯 말이다. 여성은 사회에서 만든 규정에 따라 특정된 어떤 존재다. 보통 남성에 종속된 존재, 남성의 대립항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남성 보고 여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여성스러움은 여성에 부여된 성질이다. 사회에서 만든 규정이 여성스러움이다.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요한데, 인위적으로 부여한 성질이기 때문에 꼭 여성이 여성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스럽다는 것은 여성에서 분리되어 여성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여성보고 여성스럽지 않다거나, 남성 보고 여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공정하다는 것은 공정한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공정성'을 보고 공정하다, 혹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공정성'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공정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발 박사는 불공정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다. 과제를 수행하면 포도를 주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한 마리에게만 포도를 주고 다른 개체에겐 오이를 주도록 바꾸었다. 그러자 오이를 받은 원숭이가 오이를 집어던지고 분노했다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한 대우는 역겨움을 담당하는 뇌섬엽을 활성화시킨다. 무리를 지어 살아온 인간도 불공정한 대우가 사람들 간의 갈등을 일으켜 공동체의 안정이 해치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인간은 불공정에 민감하도록 진화했다.


 그렇다면, 공정하다는 것은 특정 집단에 일관적이 규칙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글의 주장은 '공정성'은 일관적인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정성'은 이슈다. 불공정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이다. 달리 말하면, '불공정 담론'이다. 남들이 특혜와 반칙으로 부당한 이익을 가질 때 사회문제로 불거진다. 굵직한 사건들을 생각해보자. 동아일보에 사장 자녀가 부당하게 입사했다는 의혹, 조국 사태로 확대된 '부모 찬스', 부동산 정보를 선점해 부당한 이익을 챙긴 'LH 사태', 이재용의 가석방 등.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시민들의 분노가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를 향한 분노는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권력을 견제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노가 위만 향한다는 것이 문제다. 경주마처럼 곁눈질이 되지 않아 주변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규칙이 공정한지에 관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아 분노하지만, 애초에 규칙이 불공정하게 설계되었는지 따지지 않는다. 둘째, 아래로 향하는 불공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이 자신보다 특혜를 입는 것에 민감하지만, 본인만큼 수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피해를 입는 것엔 무관심하다. (첫째 문제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벗어날 위험이 커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사례만 이야기하면 '인국공 사태'다. 시험으로 평가받는 본인들의 노력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0년 근속의 전문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는 것은 노력에 다른 결과가 아니라며 불공정하다고 말한다.)


 '공정성'의 분노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이 사회의 규칙이 아래에도 공정한지 아닌지 따져 묻지 않는다. 용산역에서 만난 한 노숙자는 정신 장애를 앓고 있었다. 그 정신 장애 때문에 본인의 장애를 증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500원만 내고 타도 되는 지하철을 1,850원을 내고 타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것과 달리, 1,350원의 격차는 그에게 치명적이다. 그는 무료급식소에서 인원 제한에 가로막혀 밥을 먹지 못하면 그대로 굶는다.

 사실, 그는 돈을 내지 않고 지하철을 타도 된다. 올해 68세다. 그러나 어머니가 출생신고를 늦게하는 바람에 60년생 65세다. 만 65세가 되지 못해 내지 않아도 될 500원을 내고 지하철을 탄다. 이러한 행정시스템은 공정할까? 그래도 그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멋쩍은 웃음만 짓는다.


 서울역에서 만난 기초수급 생활자는 복지시설과 무더위 쉼터가 문을 닫아 역 주변을 맴돈다. 그의 거처는 월 40의 고시원이다. 그뿐만 아니라 역 주변을 맴도는 대부분의 기초수급 생활자들이 쪽방과 고시원에서 보낸다고 한다. 그는 나라에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 노숙자여서 비바람을 맞으며 잠을 청했지만, 나라에서 돈이 나와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이란다.

 2018년, 종로 고시원에서 화재가 났다. 11명이 다치고 7명이 죽었다. 이들의 차이는 창문이 있는지 없는지로 갈리는 3만 원이었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잠을 청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느끼는 이들의 처지는 얼마나 공정할까? 그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에서 자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말하지 않고 감사하다고 한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복지를 못 받고, 안전하게 머물 곳이 없는 이들에 관한 '공정성' 논란이 생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일관적이지 못한 규칙에 관한 분노는 공정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공정성'이 사회정의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아래도 확인할 수 있는 곁눈질이 필요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탈진실의 시대는 기성 언론이 초래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