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이야기
입사 3~4년차에는 꽤 많은 외부 강연을 들으러 다닌 것 같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비법을 조금 훔치면, 3년차 병이 좀 낫지 않을까 해서였죠. 서밋, 컨퍼런스, 강연 등 다양한 이름을 걸었지만 결국 무료 행사는 공짜로 팁을 얻고자 하는 가난한 마케터들의 눈치작전에 가까웠습니다. 플랫폼 홀더들이 하는 강연들은 30프로는 타 플랫폼비방, 70프로는 광고 영업이었죠. 페북이든 구글이든 매한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강연도 꽤 많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캐리소프트 강연이었습니다.
캐리소프트는 사내 금요교육에도 한 번 초빙받아 강연을 하신 적이 있죠. 저는 그 강연도 들었지만, 그 이전에 IT조선 사옥에서 진행된 컨퍼런스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업무 시간 중에 진행된 강의라 더욱 가산점을 준 것도 있지만(..) 시간도 더 길었고, 캐리언니도 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받았던 느낌은, 캐리소프트가 (당시의) 콘텐츠 마케팅의 최전선에서 평지풍파를 때려 맞으며 커 온 느낌이 났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의혹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업을 만들어 왔을까 싶었죠.
그 때 캐리소프트는 그리 상황이 좋지 못했습니다. 1대 캐리 언니가 나가면서 아이들이 구독을 취소한다, 어쩐다 난리가 났고, 화난 아이들과 부모들의 악플과 싫어요 폭격이 이어지고 있었죠. 지금 보면 한 번은 겪어야 할 홍역이자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캐리소프트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사실 그 때 캐리소프트가 망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캐리소프트는 당시 강연에서 무척 의연하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 줬었습니다. 그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점이, 강의가 끝나고 쏟아지는 질문들이 캐리소프트의 현재에 대한 것보다 콘텐츠 마케팅과 프로덕션 체계 전반에 대한 고민과 의문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노하우를 공유한다는 것의 위험성이 있었겠지만 캐리소프트 분들은 각자의 고민의 결과를 아낌없이 공유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말이구요. 3년 전에 들은 거라 당시 기록해 두었던 것을 꺼내 봅니다.
당시 강연의 질문, 대답은 두 명이 진행하셨습니다.
먼저 제작PD님 이야기.
1) 시청타겟을 정확히 설정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2) 첫 번째 목표는 유튜브 인기동영상이었습니다. 인기동영상 앞뒤에 걸린 영상 반응이 채널 반응에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심지어 유투브 인기동영상 작업 업체도 있다고 합니다. 쓰지는 않으셨다네요.
3) 핵심은 고정독자 확보에 있습니다. 인기동영상에 걸리는 속도가 달라집니다.
4) 차별화 + 독창성을 모두 만족시키려 노력합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 그걸 이룰 수 있는지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1) 실사, 자체제작을 병행합니다.
(2) 넓은 커버리지 (아동에서 패밀리로)를 커버하도록 전략을 잡습니다.
(3) 콘텐츠 다양성 : 장난감 등의 메인 콘텐츠 외에도 문화적 요소를 삽입합니다.
(4) 사람과 캐릭터의 조화 (사실 이게 왜 독창적인지는 모르겠네요.)
5) 캐릭터 앨리가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앨리가 간다'라는 대표 콘텐츠는 병상에 누운 아이를 보면서 기획했습니다. 가지 못하는 아이가 놀러 가고 싶어하는 것을 대리만족 시킬 수 있는 콘텐츠로 기획했습니다.
6)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욕망을 부추기는 콘텐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대리만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똑같은 것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면 그 좌절감도 클 것 같네요.
7) 촬영기법은 목표와 타겟에 맞게 (ex 눈높이 맞추기) 적당히 가감하여야 합니다.
8) 데일리콘텐츠가 중요하나, 제작의 효율성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죠.
사실 제가 더 마음에 들었던 대표님의 인사이트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주체성이 중요합니다. 브랜디드 콘텐츠/PPL은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지만 갑의 위치에 설 수도 있게 하는 요소를 만들어야 한다.
2) 유튜브를 한다고 해도, 그리고 유튜브가 마케팅 활동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영상이 아니라 그 기반의 업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수익을 위한 활동 중 하나가 영상일 뿐. 패션 유투버면 정답은 유투브가 아니라 패션계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버텨야 합니다. 콘텐츠의 힘을 쌓아야 합니다. 존버의 저력은 언제든 중요합니다
4) 유튜브는 이미 엄청난 레드오션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광고수익이 느는 속도보다 콘텐츠 수가 더 빨리 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와 디바이스가 발달할 수록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5) 인격을 갖춘 사람 캐릭터는 동물이나 기타 비인격 마스코트보다 세팅하기 어렵지만 한 번 세팅되면 오래 갈 수 있습니다.
6) 개개인의 사람에서 의존하는 비즈니스는 성립 불가합니다. 오히려 긴 호흡으로 시스템을 차근 차근 준비한 것이 길게 보면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벌써 이 강의가 2년 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들입니다. 엄청나게 세상이 바뀌는 것 같지만, 또 본질은 그리 변하지 않는 것일수도 있죠. 길을 몰라 못 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 끝까지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다양한 인사이트가 쏟아집니다. 세상의 어떤 기술이든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가문에서 대대로 소중히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들도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퍼줄 기세로 올려준 유튜버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많은 팁이 있어도 음식을 잘 하는 사람, 영어를 무척 잘 하는 사람, 영상 편집을 잘 하는 사람, 엑셀의 신, 그리고 일 잘하는 사람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재능이 없어서일까요? 꾸준히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하면서 잘 하게 되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해서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은 그런 구성원 개인들의 시행착오를 정리해서 매뉴얼화하려고 합니다. XC40 캠페인 콘텐츠 제작 차 만난 윤수영 트레바리 대표는 정말 이런 것까지 매뉴얼화해야 하나 싶은 것까지 전부 매뉴얼화 한다고 합니다. 개선과 집착이 두 개의 키워드라고도 했습니다. 우리는 성공에 이르는 방법을 매뉴얼화 하고 있을까요? 매해 우리가 많은 고객사와 해내는 것들을 조금씩 더 잘 할 수 있도록 개선하고 있나요? 개선되는 것들을 기록하고 체계화해서, 내일 갑자기 담당자가 없을 때 모레 책상 앞에 앉을 다른 팀원들이 바로 진행할 수 있게 하고 있나요?
위의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하기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을 잘 하는 것은 계속 잘 해 낼 수 있는 항상성을 가지는 것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지금과 같이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업무 흐름, 개별적 기억과 어렴풋한 경험에 기반한 프로젝트 진행, 파편화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아니라 정교하게 짜여진 워크플로우, 효율적인 업무 툴 활용 등이 무척 중요할 것입니다.
백종원이 수 많은 꼰대와는 달리 사랑받는 이유는, 훈수와 고나리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타니의 만다라트 가장 밑의 있을 법한 '실질적 액션'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랜 경험과 분석적 사고가 그에게, 상황을 보기만 해도 구체적인 행동 명령이 나오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백종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모두가 점점 덜 실패하던 그 기록들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