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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은 Aug 22. 2021

산책하는 사람

걸어갔다 길이 나 있었다 걸어갔다 모르는 길이었다 천천히 걸었다 휴식을 위해서 걷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보폭이 일정하지 않았다 걸어갔다 발자국은 핑계다 그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절실한 이유 같은 거 사방에 둘러대는 어정쩡한 변명 같은 거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색을 위해서 걷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모르는 풍경이었다 발자국이 깊이 패였다

걸어갔다 밑도 끝도 없어서 걸어갔다 밑도 끝도 몰라서 걸어갔다 밑이 안 보여서 끝 간 데 없어서 걸어갔다 걸어갔다 지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건강을 위해서 걷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등 뒤의 풍경이 한 점으로 소실되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걸어갔다 풍경이 뒤로 뛰어갔다

걸어갔다 길이 나 있었다 걸어갔다 아는 길이었다 아는 길이되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다 참견하듯 발을 집어넣었다 못다 한 말처럼 걸어갔다


다음 날에도 걸어갔다 길이 없었다 발붙일 곳이 없었다 걸어갔다 첫발을 떼고 두 번째 발을 디디고 세 번째 발을 구르고 네 번째 발을 뻗었다 발을 벗고 발들을 벗고 나섰다 발이 닳고 있었다 걸어갔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필요했다 우선 우산을 쓰자 걸어갔다 빗길 위를 걸어갔다 사족들이 발뒤꿈치에서 첨벙거렸다


―『나는 이름이 있었다』(아침달, 201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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