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여전히 웬수
# 탕탕탕, 판결
100명은 족히 들어갈 법한 큰 회의실. 수장이 등을 돌린 채 앉아 있고 수면빚 탕감자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사이 진원도 끼어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태하가 끌려 들어왔다. 태하의 죄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용서해야 한다,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부터 ‘완전히 멀리 내쳐야 한다.’까지… 그래서 쉽사리 결론이 나질 않았다. 생뚱맞게 울린 전화벨 소리 때문에 시끌벅적하던 회의실이 순간 고요해졌다.
“이 신성한 자리에 도대체 누굽니까?”
수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진원이 화들짝 놀랐다. 수장은 다름 아닌 현노였다. 놀란 진원의 표정을 보고 재밌어하던 현노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업무 보고 전화인 듯 서둘러 전화를 끊은 현노가 진원을 쳐다봤다. 뭘 하는 건지, 진원은 금방이라도 테이블 밑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이때 다시 현노의 전화벨이 울렸다. 계속 전화벨이 울리자 현노는 민망했다. 다급히 전화를 끊으려던 현노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진원을 노려봤다. 현노가 체념한 듯 전화를 받았다. 얼마나 목청이 큰지 스피커폰 상태도 아닌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회의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삼촌! 너 지금 어딨어? 어디서 뭐 해?”
“뭐라고?”
“쓸데없는 말 필요 없고, 어디냐고! 지금 거기서 뭐 하냐고! 내가 다 들었거든? 당신들이 뭔데 누굴 벌주고 말고야!”
현노가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채 진원을 쏘아봤다. 진원이 테이블 위의 볼펜을 괜히 떨어뜨리더니 줍는 척 시선을 피했다. 현노가 진원을 계속 노려보며 수은에게 대꾸했다.
“어딨 는지 말하면, 뭐 하는지 말하면 네가 오게?”
“그럼 당연하지! 내 일인데 내가 안 가? 나랑 상관있는 일인데 왜 나만 쏙 빼고 자기들끼리 해?”
현노가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자, 진원이 걱정된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럼 정말 달려올 텐데…”
진원은 현노가 자신을 노려보자, 결코 이 상황은 자기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잠시 후, 정말 수은이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가장 먼저 수은의 눈에 들어온 건 진원이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훈계를 시작했다.
“진원이 너는 좀 똑바로 좀 하고, 삼촌 너도 그만 놀러 다니고. 태하 너는 나 고생시킨 만큼 좀 더 열심히 해. 더불어 둘 다 내 어시스트 확실히 하고. 이상 끝! 해산!”
아무도 움직임이 없자, 그녀가 다시 외쳤다.
“이상 끝! 해산! 수장이 내 삼촌이면 나도 이 정도 힘은 있는 거 아닌가?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나 삼촌 아니 수장 조카라니까?”
현노의 눈짓을 본 탕감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덩그러니 네 사람만 남은 회의실.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놀란 세 남자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그녀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늘 여기서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알겠죠? 다들?”
다들 묵묵부답이다.
“와,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봐? 그간 누구 때문에 내가 몸 단련을 좀 제대로 했는데, 이참에 좀 풀어볼까요?”
“당연한 말에 대답을 뭐하러 해. 나는 바빠서 이만.”
잽싸게 현노가 나가자, 대답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진원 역시 내뺐다.
“어허, 어딜….”
한 발 느리게 반응한 탓에 태하는 그만 수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내가 연재가 좀 급해서…. 지금부터 당장 어시스트를 시작해야지 않겠어요?”
창문 밖에 매달려 이 상황을 지켜보던 현노와 진원이 고소하다는 듯 웃다가 수은과 눈이 마주치자 뿅, 하고 사라졌다.
넓고 넓은 하늘 한가운데, 오랜만에 공지가 띄워졌다. 00월 00일 00시 재소집.
모두가 진지한 가운데, 소리와 향기, 부서별 보고가 이어졌다. 수면빚을 진 자들이 몇 명이며 현재 관리 상태에 대한 보고였다. 점검이 끝나자 개선 방향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분야를 조금 더 세분화해 인간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점점 인간을 잠 못 들게 하는 이유가 많아졌다며 다채로운 연구와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더불어 갈취자에 대한 규제 방안도 보강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회의가 끝나갈 즈음 태하가 등장했다. 혹여나 수은이 따라 들어오는 게 아닌지 긴장하는 탕감자들을 보고 진원이 피식 웃었다. 수장 현노가 자신을 노려보는 걸 알아채고서야 진원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진원과 태하를 이끌었던 스승, 그리고 태하를 목격한 탕감자들이 태하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왜 태하를 소멸시켜야 하는지, 왜 태하를 남겨둬야 하는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회의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 말 안 듣는 존재, 둘
수은이 새 작품 연재를 시작했다. 멋진 남자 캐릭터를 잘 만드는 작가로 수은은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 진원과 태하를 세워놓고 이리저리 의상이며 헤어스타일이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역할에 맡게 세팅 중이다. 서 있기 힘든지 두 존재의 자세가 흐트러지자 바로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똑바로 좀 해봐!”
손목에 긴급 표시가 뜨자 진원의 얼굴이 굳었다. 이를 본 수은이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진원이 황급히 자리를 뜨자, 태하가 부럽다는 듯 진원을 바라봤다. 아차 싶어 서둘러 고개를 돌렸는데, 노려보는 수은과 눈이 딱 마주쳤다.
태하는 결국 용서를 받기는 했다. 아쉽게도 반만. 그래서 반만 자유를 얻었다. 나머지 반, 그러니까 구속의 키는 수은이 쥐고 있다. 현재 태하는 탕감자 재교육을 받는 중이고, 동시에 수은의 어시스트를 하고 있다. 태하와 수은의 관계는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었다. 주종 관계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친구, 때로는 연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동거인이기도 했다.
진원을 탈출시킨 상대는 다름 아닌 이설이었다. 수은 다음 진원의 수면빚 탕감 대상은 이설, 그녀였다. 이게 무슨 여복이 아니라 재앙인지. 진원은 다음번 대상자는 꼭 남자로 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까지 해둔 상태였다.
‘혹 내가 여자한테 잘못한 게 많아서 그런가?’
인간이었던 시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영향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수은이 갑자기 시계를 보고 하늘을 한 번 확인하더니, 태하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수은이 절대 빼먹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의식, 성수대교 위에 서서 하늘 보기를 할 시간이었다.
“일주일 중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해. 이 시간만큼은 모두와 함께 있는 기분이거든.”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기억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엄마를… 아빠를… 그리고 오빠를…”
- 끝 -
(아주 오래전에 써두었던 마음 속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