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별 그리고 선택
# 눈물의 입맞춤
1994년인지 2018년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수은과 태하가 걷고 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르게는 거슬러 올라와야 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오래 걷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참을 걷는데 태하가 수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제야 수은이 주변을 돌아봤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서점이었다. 수은은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아, 헤어지나 보구나. 이 기억 또한 사라지려나 보구나.’
태하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슬펐다. 우울해하는 수은에게 태하가 책 한 권을 건넸다. 수은의 책이었다. 태하가 책을 펼쳐보라는 듯 눈짓하자 수은이 책을 펼쳤다. 페이지가 적인 책 귀퉁이마다 꽃이 그려져 있었다. 책을 후루룩 넘기며 다양한 꽃들을 보는데 신기하게도 꽃향기가 났다. 꽃이 그려진 책은 단 한 권뿐이리라, 수은은 태하가 말릴 틈도 없이 책을 사러 계산대로 향했다.
도망치듯 서점을 빠져나온 수은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멈칫한다. 그녀가 발을 내딛고 서 있는 곳은 한강시민공원. 태하가 일부러 수은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인다. 그의 미소에 안정을 찾는 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둘은 한가로이 잔디밭 위에 앉아 있다. 태하가 상큼한 주스 한 잔을 건네자, 수은이 보답하듯 환하게 웃는다. 태하가 주머니에서 조심조심 무언가를 꺼낸다. 마른 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노란 튤립이었다. 태하가 마른 튤립을 수은에게 건네자, 어느새 꽃은 싱싱하게 변했다. 꽃말도 모른 채 수은은 그저 웃었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향기만큼은 네 곁에 오래 남을 거야.”
수은은 태하의 말을 믿기로 한다.
다시 수은의 손을 이끄는 태하. 수은이 태하의 다음 행동을 예측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하는 다시 전처럼 까칠하게 수은을 다리 위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여느 연인처럼 전망카페에 나란히 앉아 주변 풍광을 구경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속마음을 감춘 채 태하가 크리스마스로즈를 건넸다. 이번에도 그녀는 활짝 웃었다. 그녀 역시 그에게 선물할 게 웃는 얼굴뿐이라는 듯. 자신에게 기댄 채 깜빡 잠이든 수은의 머리 위에 태하가 살포시 고개를 포갰다. 그녀와 함께한 추억의 향기가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갔다.
수은과의 추억이 담긴 곳이 겨우 이뿐인지, 태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전에 놀았던 것처럼 태하와 수은은 바닥의 움직이는 그림을 따라 뛰어다녔다. 눈앞에 분수가 보이자, 약속이라도 한 듯 달려갔다. 둘이 손을 꼭 잡고, 옷 젖는 줄도 모르고 애들처럼 한참을 뛰어놀았다. 그리고 그때 그랬던 것처럼 입을 맞췄다. 쿵쾅쿵쾅, 수은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태하가 마지막으로 물망초를 건넸다.
‘나를 잊지 말아줘.’
수은의 수면빚은 그렇게 탕감되었다.
# 마지막 파티
수은이 스르르 잠에서 깨어난다. 아침 햇살이 가득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수은이 일어나 커튼을 젖힌다.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집.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 환기한 다음 화병의 물을 갈았다. 물망초, 크리스마스로즈, 노란 튤립이 싱그러웠다. 수은이 향기를 맡으며 미소를 짓는다.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 반드시 볼 것이라고 믿으면서.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집안을 오랜만에 둘러보는 수은. 물건이 참 많았다. 버리는 걸 모르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청소하는데 끝이 없었다. 슬슬 지쳐갈 무렵,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다들 제멋대로 열고 들어오더니 어쩐 일로 벨을 누르는 건지.
진원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초밥을 먼저 내밀었다. 사고 이후로 입에도 안 댔던 것 같은데, 어찌 알고 사 왔는지. 하긴 그는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수면빚 탕감자는 참 신비한 존재였다. 맛있게 초밥을 먹고 있는데 또 초인종이 울렸다.
“이번엔 또 누구야. 설마?”
수은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히 드러났다.
“누굴 기다린 거냐? 아무리 실망해도 그렇지. 뭘 또 그렇게 얼굴에 쓰고 난리야?
근데 한 놈은 어디 갔어?”
진원과 수은이 모른 척하자 자연스럽게 현노가 그 틈에 끼어 밥을 먹기 시작한다. 진원과 현노, 두 사람 때문에 식탁이 가득 찼다. 꼭 파티를 열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왜 왔어?”
“삼촌이 조카 집에 오는데 이유가 있냐?”
한동안 안 그러더니 삼촌 현노는 또 까칠했다.
“왜 또 이래?”
“달력이나 봐라, 녀석아. 오늘이 그날이잖아.”
매달 연례 행사하는 바로 그날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어디 갈 건데?”
“오늘은 극기 훈련을 좀 해 볼까 싶은데, 번지점프 어때?”
온 근육이 놀라서 밤에 잠이 잘 올 거란다. 그 소리에 진원이 거들었다.
“이제 그런 거 안 해도 제가 잘 재울 수 있습니다.”
현노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거 설마 프러포즈?”
두 남자가 자신한테 왜들 이러는지, 수은은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수은은 결국 현노에게 끌려 나왔다. 다행인 건 진원도 함께라는 것. 둘이라서 무섭지 않았다.
# 수은의 선택
수은은 연재를 계속 이어갔다. 독자와의 약속이니까. 하지만 뭔가 좀 달라진 듯한 느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랄까. 수은의 일상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진원의 상담실에 가서 상담 같지 않은 상담을 받았고, 현노의 사무실에 가서 새로운 작품 구상 회의를 했고, 전처럼 여전히 쏘다녔다. 돌아다니다 피곤에 절어있는 사람을 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어떤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탕감자일까 아님 갈취자?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자기를 지켜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겠지? 나처럼?’
가끔 수은은 그 존재에게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사람 아니죠?”
그럴 때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존재들은 놀라서 횡설수설했다. 그 모습이 뭐 그리 우습다고 수은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배를 잡았다.
# 이설의 선택
이설은 잡지사를 그만두고 빈둥빈둥 백조 놀이를 하고 있다. 모처럼 대청소를 하기로 한 날. 방을 정리하던 중 그때 그 기사를 다시 마주한다. 자신도 희생자 가족이면서 수은에게 어떻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 자기 엄마 얘기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썼는지 자신이 한 행동이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은을 다리 위로 끌고 가던 날, 그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충격 때문에 이설은 한동안 다리 근처에는 얼씬도 못 했다.
아직 엄마와 대화를 썩 잘하진 못한다. 서로 어색하기 때문이다.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지 너무 오래됐기에. 아니 자라면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엄마도 이설도 천천히 거리를 좁혀가기로 했다. 아직은 눈만 마주쳐도 어색해서 웃거나 피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두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그 사람, 진원에게 상담을 받으러 갔다. 이설의 엄마도 진원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설은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인연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2018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24년이 되었다. 성수대교 북단 인근에 유족들이 마련한 위령비가 있다. 매해 위령제를 올렸지만, 희생자 서른두 명의 가족이 모두 참석하는 건 아니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유족은 특히 참석하지 않았다. 수은도 이설도 참석한 적 없었다. 다리 근처에 갈 수 없을 만큼 아직도 아파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족끼리만 치르던 위령제를 몇 해 전부터 구청과 함께 지낸다고 했다.
이설이 용기를 낸다.
“엄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엄마가 말없이 이설을 바라본다.
“엄마도 용서를 빌고 싶지? 나도 엄마한테 용서를 빌고 싶어. 그래서 나… 가고 싶어.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고.”
엄마와 단둘이, 병원도 아닌, 산책도 아닌 제대로 된 외출을 24년 만에 나서는 이설은 행복했다. 그게 어디든 상관없었다.
이설과 엄마가 위령비 앞에 도착하자 모여있던 사람들이 그들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우리끼리라도 기억해요.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잖아요? 앞으로 이런 사고는 계속 일어날 거예요. 그때마다 시끌벅적 호들갑 떨고 그러다 또 잊히겠죠. 하지만 우린 기억하자고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가족이니까요.”
엄마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반응했다. 놀란 이설이 엄마의 시선을 따라가자, 수은이 서 있었다. 진원도 함께였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땐, 그저 두 손을 맞잡거나 꼭 끌어안으면 그만이었다. 세상 모든 일을 다 말로 해서 아는 건 아니니까. 만나면 무슨 말이든 꼭 해 주고 싶었는데… 이설은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이설의 엄마가 귓속말했다.
“오늘따라 저이 좀 달라 보여. 오래전에 꼭 만난 적 있는 것 같달까.”
“에이, 엄마가 진원 씨를 어디서 봐.”
“아니야, 분명 본 적 있어.”
이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엄마는 계속 진원을 주시한다. 마치 오빠처럼 애정 가득한 눈길로 수은을 바라보는 진원을…
수은이 갑자기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음악을 튼다.
“온 가족이 함께 듣곤 하던 팝송이에요.”
<When October Goes>가 흘러나온다. 한참을 따라 부르던 수은이 갑자기 흥얼거림을 멈췄다. 분명 다른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수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따라 부르는 목소리가 사라지자, 수은의 얼굴에 잠시 슬픔이 깃든다. 수은이 다시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엄마, 아빠, 오빠가 들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