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iscellaneou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 모래시계 Aug 19. 2021

Isn't she lovely?

45cm,1950g 출생증명서

딸 일곱에 아들 하나를 거뜬히 낳고 길러 주신 친정 엄마와 순풍순풍 조카들의 출생 소식을 잘도 들려주던 다섯 언니들을 닮아 나도 출산에는 최적화된 몸이라 자신했다. 오산이었고 착각이었다.

첫 임신 7개월째부터 내 얼굴과 몸은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살이 쪄도 너무 찐다며 별생각 없이 지내다 정기검진 날이 되어 병원에 들렀다.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임신중독 상태니 지금 바로 대학병원에 가라며 소견서를 써주신다. 마치 불치병을 진단받은 것처럼 떨리고 막막했다.


 "익을 때까지 나무에 달려있는 과일 열매가 크고 맛도 좋잖아요. 뿌리에서 영양분을 맘껏 받을 수 있어서 그래요. 아기도 엄마 몸에 달린 열매와 같아서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엄마 뱃속에서 자라야 하는데... 음... 지금은 뱃속 아기가 엄마한테 아무 영양분을 못 받고 있어요. 그런 경우에는 아기를 꺼내 밖에서 키워야 해요. "


집에 가서 입원할 준비를 하고 내일 다시 오란다. 입원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다 아기와 만날 날을 기다리며 남편과 함께 흥에 겨워 하나씩 둘씩 사다둔 배냇저고리며 앙증맞은 싸개와 이불을 보는 순간 울음이 후드득 터졌다.

다음 날 오후 2시.

전신 마취는 위험하다며 척수 마취로 제왕절개 수술을 한단다. 수술 전 수술동의서 항목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며 남편은 홀로 세상에 남겨질 것을 각오하듯 어금니를 물고 보호자란에 서명을 했다고 나중에 들려주었다.

수술이 시작되었는데 의식은 또렷하다. 아랫배 쪽에 서늘하며 날카로운 금속이 지나가는 듯 불쾌하다. 수술 중에 들어온 신생아실 의사 선생님과 수술을 집도하는 산부인과 선생님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산부인과 선생님 : 아기가 작아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해요. 자리 있지요?

신생아실 선생님 : 통보받은 게 없는데... 비어 있는 인큐베이터가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온몸의 감각은 마취된 채 수술대에 누웠지만 의식은 또렷한 나는 벌떡 일어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며 따지듯 묻고 싶다. 기운을 모아볼까 눈에 힘을 주려는 찰나에 들려오는 소리.


신생아실 선생님 : 아, 오후에 퇴원하는 아기가 있어요. 그 방에 들어가면 되겠어요.


45cm, 1,950g이라고 적힌 아기의 출생증명서를 아기 대신 받아 들고 퇴원했다.

초유를 먹여야 아기가 건강하다기에 낮에 모유를 짜 놓으면 남편이 퇴근해서 아기가 있는 병원으로 모유 배달을 했다. 병원에서 남편이 가져온 빈 젖병을 보면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품에 안기지 못한 아기와, 낳자마자 아기를 품에 안지도 못한 엄마의 신세가 떠올라 꾸역꾸역 온몸에 울음이 차올랐다.


매일 오전 10시, 오후 5시에 신생아실로 전화를 걸어 아기의 몸무게와 상태를 확인했다. 몸무게는 살짝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올랐다. 2 킬로그램이 넘어야 집에 오는데 그날은 언제가 되려나. 설상가상 혈액 수치가 좋지 않아 수혈도 해야 한단다.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은데, 엄마의 기운이 아기에게 전해진다니 말을 삼가고 몸을 조심해야지.

매일 신생아실로 거는 전화가 아기와의 유일한 연결 끈이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불러주는 아기의 몸무게를 탁상 달력 날짜 아래 적어두고 마치 아기를 보듯 한다.

아기의 몸무게를 달력 아래 적어 내려 간지 30일째 되는 날, 의사 선생님이 이제 퇴원해도 되겠다며 내일 데리고 가란다. 전화를 끊자마자 어디에서 이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원더우먼과 힘겨루기를 해도 이길 것 같다.


친정 엄마가 포목점에서 천을 떠 와 다섯 가지 색깔의 실로 테두리를 한 올 한 올 감침질 해 기저귀를 만들어 주셨었다. 아기가 없을 때는 한없이 처량해 보였던 서른 개의 기저귀를 꺼낸다. 한 번 삶았다고 해도 조금 뻣뻣한 기운이 남아있다. 찜통에 폭폭 삶아 세탁기로 헹굼과 탈수를 더 한 다음 베란다로 가져가 기저귀를 넌다. 하얀 무명천에 오색실로 감침질된 기저귀는 이제야 하나같이 어여쁘다. 기저귀를 탁탁 힘껏 털어 널며 나는 흥얼거린다. 갓 태어난 딸을 만난 기쁨과 환희를 온 우주에 타전하는 그 노래, 스티비 원더의 Isn’t she lovely를.


https://www.youtube.com/watch?v=RfHQOlHJczU

 

제목 그림 : 산드로 보티챌리의 비너스의 탄생  



매거진의 이전글 날아라 오리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