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꽃 바람 May 11. 2023

존엄; 무엄과 무례 사이

왕이나 귀족들이 하는 말 "무엄하도다". 무엄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엄을 침해한 자에게 던지는 말이다. '엄'이 없다는 말이다.

사전에서 '엄'을 찾아보니, 매우 철저하고 바르다, 혹독하다, 엄격하다는 뜻이다. 존엄에도 같은 '엄'이 쓰인다. 철저하고 바름이 없는 상태, 두려움이나 엄격함이 없이 들이대는 상태가 '무엄'인 것이다. 반대로 존엄은 철저하고 바름을 높인다는 뜻이다.  


무엄하다는 말을 들여다보니 그 말 자체가 '엄'이 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무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존엄을 추구하는 행동을 순식가에 자신의 존엄 아래도 내팽개 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례하다는 말도 그런 권력의 힘을 보여주는 말일지도 모른다. 무례하다는 말을 가진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보다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기에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무례하다는 말은 태세 전환의 치트키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인간성의 흠집을 내서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고 대중들로 하여금 '예의 없음'에 대한 총공세를 펼칠 수 있는 판을 열어준다.



맥락이 없이 말하는 예의는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예의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라는 뜻이다. '마땅한'은 맥락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 '마땅함'은 달라진다. 요즘 말로 TPO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맥락에 대한 해석은 다분히 권력적이다. 마땅함에 대한 적절성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감정의 입자도'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다. 감정의 입자도는 감정 어휘를 얼마나 촘촘하게 가지고 있는지, 감정이 얼마나 세세하게 분화되어 있는지를 말하는 용어이다. 감정의 입자도가 세밀한 사람은 같은 상황을 더 촘촘하게 해석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더 정확하게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에 감정에 대하 조절 능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인간의 권리와 불평등에 대해서도 '입자도'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같은 상황을 겪더라도 누군가는 그 안에 숨겨진 폭력과 불평등의 구조를 찾아내고 기어이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섬세한 입자도를 가진 사람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입자가 가는 모랫길을 걷는 것처럼 한 걸음을 떼기가 어렵다. 매 걸음마다 발견되는 폭력과 불평등의 입자들이 그의 발을 붙잡기 때문이다.


무엄과 무례함 사이에서 한없이 작고 낮아졌을 누군가의 '존엄'을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이 섬세한 입자도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해 본다. 자신의 존엄이 짓밟히는 고통이 살던 대로 사는 고통 보다 더 컸던 사람들이 넓혀준 '존엄'의 지평 위에 내가 서 있음을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