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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Jun 08. 2023

최선을 다하지 않는 마음

최선을 다해야 할까?

오랜만에 후배와 친구를 만났다. 아이들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마음 먹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모이듯 아이들 이야기로 귀결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또래를 키우고 있어서 요즘 아이들에 대한 우려와 요즘 아이인 자식에 대한 걱정이 이어진다. 생각해 보면 그즈음의 어린아이였던 우리도 썩 훌륭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래도 꽤 괜찮은 어른이 된 것 같은데도 걱정은 줄지 않는다.

베타 한손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소년> 1940년대

"아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야."

"난 오히려 아이가 중요하지 않은 일에 최선을 다할 까봐 걱정이야."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결과가 어떻게 되든 최선을 다하는 태도는 중요하잖아."


"너는 지금 네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응. 나는 내 일에 사명감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친구의 사명감이라는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열띠게 오고 가던 티키타카는 경쾌한 리듬감을 잃고 멈춰버렸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최선'과 '사명감'이라는 말이 어디로 자리를 잡아야 할지 몰라 갈 길을 잃는다.  요새는 소설 속에서도 보기 어려운 단어이며 단체장들도 '꼰대' 소리가 두려워 감히 꺼내지 않는 낱말이다. 그런데 전혀 꼰대가 아닌 내 친구의 입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최선'에 이어 '사명감'이 등장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있지만, 오래도록 들여다보지 않아서 먼지가 앉아 남루해진 그 낱말들을 살펴본다. 유물처럼 느껴지는 최선과 사명감이라는 두 개의 망치가 한꺼번에 머리를 내려친다.


더 이상 나에게 '최선'은 빛나는 인생의 치트키가 아니다. 이미 '노오력'이라는 시대의 담론으로 날개 한쪽이 떨어져 나갔고, 과정의 힘을 믿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초라한 결과 앞에 한없이 작아져야 했던 수많은 시도들로 인해 나머지 날개 한쪽도 떨어졌다.


그러나 날개를 잃은 최선은 땅으로 추락하지는 않았다. 날개가 없어서 남들이 보기에 더 이상 최선의 모양새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나의 최선은 날기 대신 걷기를 선택한 새로운 종이 되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혹여나 다시 날개가 돋아날까 봐 노심초사하며 다시 원래의 최선의 꼴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쓰며 걷기를 선택했다. 절대 다시는 날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최선 쌍둥이 같은 '사명감' 또한 마찬가지다. 사명감(使命感)은 한자어 그대로 풀면 주어진 일을 목숨처럼 여기는 마음이다.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만약 내가 목숨을 던져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말하는 사명감이 바퀴가 4개 달린 세단이라면, 내 사명감은 이륜차 정도의 모습일 것 같다.

 

나는 아이나 내가 최선을 다할까 봐 걱정스럽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해서는 방향과 속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확신이 없다.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닌 데 속도를 내면 사달이 난다. 제대로 된 방향이더라도 깜냥에 넘치는 속도를 내면 타이어가 터지고 가랑이가 찢어진다.


삶의 방향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된 방향과 속도가 나에게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그러니 섣불리 롤 모델이라는 이름을 붙여 누군가의 삶을 향해 가랑이가 찢기고 타이어가 터져 가며 좇아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최선이나 사명감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최선과 사명감을 판단한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무한 가스라이팅이 시작이다. 처음에는 그저 한 사람의 왜곡된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 듣다 보면 그것이 세상의 시선이자 내면의 목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왜곡된 최선과 사명감은 날개 달린 창이자, 바퀴 달린 불도저가 되어 내면을 황폐하게 만든다.


나는 다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일에 최선을 다하지 말자고, '일'을 '목숨'처럼 여기지는 말자고 다짐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속도를 내고 두 눈을 감고 나도 모르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있다. 아이도 그럴까 봐 걱정이 된다.


내 것이 아닌 방향으로 들어서게 되더라도 너무 멀리 가지 않으려면, 외부의 떠밀림으로 제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게 되더라도 너무 빨라지기 전에 멈춰 설 수 있으려면, 최선을 다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갔던 만큼 다시 되돌아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아껴두려면 최선은 위험하다.



2050년의 기대 수명을 무려 150세로 예견한 미래학자도 있다. 그런데도 그런 시대를 살아갈 오늘날 아이들의 진로는 18세 수능으로 결정된다고 믿는다. 18세에 결정된 진로로 나머지 92년의 시간이 결정될 리가 없다. 기대 수명이 35세 안팎이었던 조선시대에 과거 시험에 목매달았던 것과 같은 격이지 않을까?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명감 없이 휴직의 시간을 보내며 헤맴의 시간을 보내 보니 알 것 같다. 나와 아이에게 필요한 건 헤맴과 어슬렁거림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최선과 사명감의 광풍을 헤치며 기꺼이 헤맬 수 있는 용기이다.


경쟁을 부추기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지금 앞서나가야 20년 뒤에도 앞서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 광풍 속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게 참 힘들다. 요즘은 부모만 힘든 것이 아니라 아이도 힘들다. 그 이상한 기운을 그 조그만 녀석도 느끼고 불안해한다. 최선을 다해 불안해할까 봐 걱정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애써야 겨우 최선이 아닌 제 속도와 방향을 지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땅만 보고 기계적으로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고 헤매고 어슬렁거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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