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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Jan 29. 2022

언젠가 벗겨질 콩깍지에 대하여

20220127_After Glow  with H


   H와 오랜만에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결혼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 걸까, 콩깍지가 씌었던 것 같다, 웨딩 촬영할 때 동생이 내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고 했었다, 지금은 서로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함께 지내는 동거인이지 반려인은 아니다, 나는 그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잘 통하는 사람이 처음이라서 정말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결혼을 결심하게 했던 모든 결론의 문장이 모두 과거형이라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내가 선택한 과거의 남자와 함께 현재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모든 확신의 문장들이 과거형이 되어버린 채 현재를 살고 있으며 어떤 미래형 문장을 살아가야 할지 합의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러나 문득 뉴필로소퍼에서 읽었던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나의 남편이 그때 내가 결혼을 결심했던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가 닿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세포도 6개월이 지나면 모두 바뀐다고 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의 세포도 생각도 외모도 지금 내 남편과 같지 않으므로 그때 그 남자가 지금의 내 남편인가 라는 질문은 굉장히 필연적입니다.


  테세우스의 배는 결국 동일성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며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입니다. 그리스 델포이 아테네 신전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로 던져진 화두는 여전히 우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수다 속에서 피어난 이 질문의 시작이 내 눈에 씌었던 콩깍지였다는 것이 재미있네요. 결국 삶은 철학이며, 철학은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OTT 채널을 통해 보았던 완벽한 타인이 떠올랐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 던진 "당신, 낯선 사람이었네!"라는 통찰의 외마디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진 월식의 장면으로 시작하여 다시 그 월식의 장면을 함께 했던 어른이 된 주인공들의 저녁식사가 영화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타인은 진짜 그 사람일까요? 우리가 보았던 그날의 월식의 달이 여전히 우리가 아는 그 들일까요?

  

  영화는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진 찰나의 순간에 각 주인공의 그림자와 같은 비밀들을 보여줍니다. 휴대전화 공개하기 게임으로 시작된 그 진실 게임에서 마초인 줄 알았던 체육교사인 친구는 게이로 드러났고, 항상 규범적이고 가부장의 전형이라 여겼던 변호사는 텔레그램으로 사진을 보는 남자였습니다. 이 사업 저 사업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나만 사랑하는 사랑꾼이라 여겼던 남자는 자신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매니저와 내연 관계이며 심지어 임신까지 하게 했고 자신의 오랜 친구의 아내와도 내연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달은 그저 달이며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진 신비로운 달의 모습은 찰나로 끝이나 마치 월식이 있기는 했던 것인지 꿈처럼 느껴지듯이 이 영화의 비밀도 현실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채 주인공들의 월식은 마치 없었던 듯 달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영화가 보여주었던 비밀의 시간들은 사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가정법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염정아의 대사 "당신, 낯선 사람이었네!"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 순간 영화를 보는 나 자신이 낯설어지기도 했으면 내가 이야기했던 타인에 대한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의 대한 확신이 결국 순간의 인상일 뿐이며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의 말들 또한 어느 순간 거짓이 될 수 있는 찰나의 감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의 꼬리들이 저 깊은 허무로 빠질 때쯤 쌓여있는 빨랫감과 설거지 더미가 나를 다시 일상으로 소환합니다.


  H와 나의 끝을 모르고 뻗어가던 대화도 결국 아이의 학원 픽업 시간에 맞춰서 강제로 결승점에 순간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참 즐거운 찰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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