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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Apr 08. 2022

말해 뭐해,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은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영이 네가 아직 이해하기는 어렵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 같다가도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당장 목숨이 걸려 있다면, 죽음 앞에서 누구나 이기적인 선택을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수연의 말대로 아영 자신이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이어서 그런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결국은 더스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존경과 의심 사이에서, 온유의 노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마치 두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는 듯한, 위태로운 느낌이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헌자들을 존경하고, 더스트 시대를 기억하고, 또 그 시대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온유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돌아서서는 어두운 소문을 실어 나르곤 했다.     -64쪽


  더스트 시대 대신에 제국주의 시대를 넣어도 문장은 성립한다. 삶과 죽음이 개인의 의지로 어쩔 수 없었던 그 수많은 시절들을 넣어도 문장은 성립한다. 역사 속에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우리는 지금 분명히 살아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하고, 비극을 양분 삼아 부를 축적했던 기회주의자들의 처단해야 한다고 현재를 사는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지금 생존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조상 가운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밟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아영이 말했던 두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고 위태롭게 역사를 말하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이 '나'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 가면 없이도 새로운 더스트 시대를 살아가는 내성종이 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이 굳이 학교 같은 것을 만든 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 앞에 선 어른들은 늘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 165쪽


  망해가는 세상에서 학교를 세우는 마음들은 무엇일까?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현재의 자신을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가고 싶은 인간의 불멸을 향한 욕망이지 않을까? 자신의 DNA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육체적인 번식을 한다면, 자신의 정신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학교'라는 기제를 만든 것이 아닐까? 물론 교육은 그 어원에서처럼 주입이 아니라 내면에 있던 무언가를 '꺼내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학교를 세우는 어른들의 마음속에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의 무언가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영속의 욕구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욕구가 인류의 번영과 유지라는 종 전체의 목적을 이루는 데 어느 정도 효용이 있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입증이 되었기에 이제는 모두가 '학교'라는 기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지구의 역사에 비해 한없이 짧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학교가 등장한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당연하지 않고 새로운 문화가 순식간에 당연해지고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는 일은 빈번하다. 


  태양이라는 별의 수명이 100억 년 정도이고, 지금 태양은 45억 살이니까 앞으로 55억 년 뒤면 지구도 태양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동안 태양계는 소멸의 수순을 밟아가며 지금과는 다른 환경을 지구에게 선사할 것이고, 그 거대하고 풍부했던 공룡의 존재가 사라졌던 것처럼 인류도 언젠가는 사라질지 모른다. 인류가 사라진 시간에도 지구는 돌고, 태양은 빛날 것이다. 영원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 내일이 당연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었다면 내일도 올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인류의 발전에는 필요했던 것 같다. 흔들리는 오늘 위에 학교를 통해 내일을 세우는 어른들의 마음을 조금을 알 것 같다. 그 행위가 흔들리는 오늘을 버티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 폐허를 걷다 보면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어. 타인의 무덤을 파헤쳐서 이곳의 삶을 쌓아 올리고 있다는 생각. 더스트폴 이후로 세상은 예전보다도 모순으로 가득해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과 삶이 한 장소에 공존하는 어떤 기묘함. 어쩌면 이곳 프림 빌리지도 그런 장소일 수 있었다.  -186쪽

  프림빌리지는 다른 대안 공동체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더욱 복잡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만 무언가에 의해서 가려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미디어가 부여한 거짓된 '삶'과 '가치'가 모순을 가리고 있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모순적이지만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방향성을 유지하고 위해서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짧은 침묵을 통해 나는 지수 씨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만큼 지수 씨는 나를 존중했다. -243쪽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여성'들이 서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벡델 테스트를 초과해서 통과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한 '여성'임을 드러내는 여성성의 묘사는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드시 여성성이 서사에 필요해서 여성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도록 작가가 의도한 것 같지 않다. 남성을 화자로 선택할 때 반드시 '남성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그저 인간으로서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지수(희수), 나오미, 아마라, 아영, 수연(아영의 어머니이지만 아영의 어머니라고 서술하지 않고 이름으로 서술하여 더욱 좋았다.), 윤재

 남성도 여성도 아닌 사이보그   레이첼

 남성인지 여성인지 특정되지 않은 하루


  그래서 이 책이 영화화된다면 굉장히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책으로 읽을 때는 남성과 여성을 시각화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으로 상상하여 서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현실 속에서 각 캐릭터들을 캐스팅을 하다 보면 '여성성'이라는 것이 개입되게 되어서 서사가 훼손될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로 만들면서 본래 작가가 의도했던 캐릭터가 훼손되는 것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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