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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Apr 01. 2022

켜켜이 쌓인 삶과 죽음의 이야기

김여정 <다크 투어>, 그린비(2021)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 -목포의 눈물


   DARK TOUR. 어둠 여정.

   해가 지고 난 자연스러운 어둠이 아니라 억지로 눈싸개가 씌어져서 보여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었던 외면되고 말살되고 봉인되어 한 번도 당당히 빛 앞에 선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머물었던, 사라졌던 장소를 찾아가는 여정.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국가보안법) 제정.

   1948년 4.3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 제14연대의 출항을 명령했으나 오히려 명령을 내린 군부를 향했던 10.19.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이승만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숙청'을 위해 만든 법.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부끄러운 현재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국가보안법.

일제가 우리를 수탈했던 그 방법과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결국 제국주의의 반복과 변주.


   일본 제국주의의 시설과 체계가 이름만 바꿔 여전히 기득권을 대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독립을 했던 것일까? 삶은 여전히 고되고 삶의 뒤에 바짝 붙은 죽음과의 뜀박질은 여전히 계속되던 그 때에 그저 이름이 바뀌었을 뿐 기득권을 누린 자들의 행태는 변함이 없었고 삶은 무엇으로부터도 해방되지 않았다. 해방에 대한 기대와 희망만 있을 뿐 해방의 실체는 없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그저 숨죽인 '기다림'을 이어갔다. 


   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시간의 힘은 기록과 기억을 앗아갔지만 자연은 오래도록 그 곳에 인간 보다 오래 인간의 삶을 바라보고 침묵한다. 수용시설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형장에는 폐기물 처리함이 설치되었다. 인간을 폐기물처럼 '처리'하던 그 장소에서 이제는 쓰레기가 처리되고 있다. 그 모든 시간이 사라지고 기록도 사라진 그곳에서 오래된 나무에게 질문하고, 나무는 침묵으로 대답한다. 


   죽음을 기록하는 역사의 방식은 늘 변함없이 승자의 문법을 따른다. 어떤 인간들은 언어가 아닌 그저 '숫자'로만 기록되기도 한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도 풍성한 기억을 갖지 못했지만 죽음도 빈약하고 남루하다. 기록조차 홀대 받는 그 사람들을 누가 기억할까?


이제 칠순이 훨씬 넘은 그 소년은 가족들을 영암 최고의 멋쟁이로 만들어 보내기 위해 광주까지 가서 한복을 맞춰 왔다. . . . 여운재 위에는 수많은 알록달록한 옷들을 태우는 연기가 푸른 하늘을 수놓고 있다. 고개 위에는 울음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5쪽


  쓸데없는 짓임을 안다. 완벽하게 불합리하고 미신적임을 안다. 그럼에도 단 1%의 가능성이라도 평생 믿은 적 없는 신의 존재이지만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신이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옷을 태워 저 세상의 옷을 보낸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완벽한 불합리이자 마음 속에서는 완벽한 합리의 순간이다. 간절함은 거짓도 진실로 만든다. 남을 위한 진실이 아니라 살아남은 나와 나의 사랑을 위해 그것은 말도 안되지만 진실이므로 그 진실에 온 정성을 다한다. 어떤 삿된 것도 끼어들 여지 없이 완벽하고 경건한 의식이 된다. 


  고통의 원근감. 가까이 있어도 느껴지지 않고 공감 받지 못하고 그저 멀리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내 가까운 이웃의 고통들. 반드시 느껴야 마땅한 당위적인 고통과 공감들이 잔인하고 자의적인 원근법에 의해 마취된다. 자기 합리화, 오만, 무지는 강력한 마취약이 되어 사고와 감정을 마비시킨다.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신들의 섬, 죽음의 섬


  1965년의 발리 학살은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악인들의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머리와 가슴에 악이 들어찬 그들이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생각하기, 행동하기, 타인에 고통에 대한 공감하기가 마비되면 누구나 악이 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이라 여겼었는데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확인한다. 나라는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아집이 생기게 되고 타인이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함이나 당위성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인류 비극의 시작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학살이 퍼져나갈 무렵, 신을 믿지 않는 공산당은 최저의 부류로 그들은 죽이는 것은 닭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설교가 이슬람 사원을 통해서 퍼져나갔다. 수하르토의 학살부대는 무종교인들을 공산당으로 분류하고 살해했다. 먹고살기 바빠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공산당으로 몰려 살해되었다. -62쪽

  사람들은 신을 믿고 있음을 신이 아니라 학살자들에게 증명해야 했다. 신의 이름으로 그들은 살인을 저질렀고 피아를 구분 짓는 방식으로 종교를 선택했다. Genocide의 geno는 종족이나 인종을 뜻한다. 우리가 아닌 타자를 철저하게 구분 지어 완전히 절멸(cide)시킨다. 그 구분을 짓는 방식으로 종교가 이용되었고 일상을 침투한 구분 짓기는 삶의 모습을 바꿔 놓았다. 



1948년 바탕칼리 학살 -정글의 '구눙 티구스'


사보타주(sabotage) - 적의 비군사물에 대한 파괴

1948년 12월 12일. 영국군 제2스콧 경비대의 7 소대 대원들이 공산 게릴라 색출을 위해 바탕칼리 고무나무 농장을 수색했다. 이들은 고무나무 농장에서 수액을 채취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포위하여 기관총으로 사살한 다음 시체를 훼손해 개울에 버렸다. 고무나무 농장과 바탕칼리 마을도 소각해서 증거 자체를 없앴다. 당시 신문에는 금주 최고의 뉴스로 '바탕칼리에서의 성공적인 게릴라 소탕'이 크게 보도되었다. ....2012년, 바탕칼리 사건은 영국 법원에 제소됐지만, 2015년 11월 영국대법원은 공소시효 만료로 바탕칼리 사건을 기각했다. 이는 나치 범죄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는 공소시효 기간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국제법 판례에 배치되는 판결이었다. -77쪽

'구눙 티구스'는 산에 사는 들쥐라는 뜻이다. 바탕칼리 농장에서 일하던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말로 영국 퇴역 군인이 사용하던 말이다. 사람을 쥐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그 학살을 저지르고 다시 런던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완전히 잊어 버릴 수 없다면 완벽하게 왜곡하는 것으로 생존을 위해 기억을 조작한 것일까? 아니면 그는 사고, 행동,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지로 똘똘 뭉쳐 있으며 여전히 그 견고한 자기 세계에 균열이 가지 않은 상태로 그렇게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전형인 것일까?



1947년 타이완 2.28 사건 -임을 위한 행진곡, 메이리다오


33년 뒤에 광주에서 있었던 5.18과 닮은 꼴. 

대학시절 김여정작가의 룸메이트는 결혼식을 앞두고 타이베이에서 오는 아버지를기다린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지 못했다. '오아시스 빌라'에 살았었기 때문에 출국을 거부 당한 것이다. 아름다운 이름과는 달리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우리 역사 속에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타이완은 제주와 닮아 있다.  

섬. 수탈지. 학살지.

   1895년, 타이완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때 청나라에 의해 일본에 할양되었다. 격렬하게 거부했지만 일제가 우리를 수탈하고 말살했던 방법은 타이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국이 되면서 1945년 10월에 해방을 맞이하지만 제주가 그러했듯이 또 다른 기득권층이 이름만 바꿔 제국주의의 변주로 그들을 압박했고 "개(일제)가 물러가니 돼지(국민당)가 왔다"라는 말도 나올 지경이었다. 일제가 제주를 병참화하여 수탈하였듯이 장제스는 중국대륙에서 공산당과의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타이완을 선택했다. 저항하는 타이완 시민들을 탄압하기 위해 장제스는 군대를 보내 14만 명의 타이완 지식인들을 중국 스파이나 선동가라는 이름으로 '오아시스 빌라' 등에 구금하고 4천여명을 처형했다. 89세의 나이로 장제스가 죽을 때까지 40여년이나 공포정치가 이어졌다. 


  제주의 4.3이 1947년 3월 1일 기마경찰이 말에 치인 아이를 두고 가는 광경을 본 시민들이 항의하고 경찰의 발포가 계기가 되어 발발하였듯이, 타이완의 2.28 역시 1947년 2월 27일 청년 한 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발발하였다. 전매국 단속원이 타이베이 천마다방 앞에서 담배를 불법으로 판매하던 노인을 검거하면서 구타했고 이 광경을 본 청년이 항의하다가 경찰의 총에 맞은 사건이 시작이었다. 


타이완 전역에 장제스 동상이 4만 3천 개나 있다는데, 그런 독재자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중정기념당에는 장제스가 사망한 당시 나이인 89세를 기리는 89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며 25톤의 돌로 만든 장제스 총동의 동상이 중국 대륙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다. -117쪽


  독재의 역사와 반민주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기득권층이 거기에 어깨를 걸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독재를 완전히 청산에 뿌리를 뽑으려고 보면 그 뿌리에 주렁주렁 걸쳐져 있는 현재 기득권자들의 잔뿌리가 있기 때문에. 박완서의 <두부>에서도 나왔듯이 일제 시대의 국어 교사가 해방 조국에서 역시 국어 교사를 하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던 그 때의 상황처럼. 


장제스는 중국에서 철수할 때, 베이징 자금성의 고궁 박물원에 전시하던 국보급 유물을 가득 싣고 타이완으로 옮겼다. 피난민 수송을 목적으로 빌린 미군 군함에는 피난민 대신 유물이 가득 실렸다. 파난선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본토에서 그대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118쪽 


  독재자의 모습들은 어쩌면 이렇게 닮은 꼴일까. 6.25 전쟁이 발발해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신한 이승만이 뒷날 한강 인도교를 폭발했던 장면과 닯았다. 박완서의 <두부>를 보면 공산군이 들이 닥친 서울에서 미처 한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집 밖을 나설 때 붉은 리본을 만들어 꽂았다고 한다. 살아 남기 위해서 그들의 피아 구분에서 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다 다시 서울이 수복되었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그들에게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공산당에게 동조했기 때문이라면 그들을 죽였다. 그들의 죽음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죽이는 정권에는 정당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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