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꽃 바람 Feb 26. 2022

흔적을 지우는 노동에 대하여.

김민섭 <대리사회>, 와이즈베리(2016)

  


18쪽

모두가 존중할 만한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에 없던 자각, 노동은 그러한 성찰을 가능케 했다.


우리는 '노동'이라고 하면 '육체'를 그 앞에 암묵적으로 붙인다. 노동은 은유로서가 아니라 실체로서의 '땀'과 연결되어 있어 책상에 앉아서 무형의 무엇인가를 다루는 일은 노동이라는 자각을 하지 못하도록 가려진다. 어떤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동등한 노동이며, 내가 누리는 일로 인해 받게 되는 모든 혜택 역시 '노동자의 권리'와 다름없음을 이 글을 보며 자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노동이 있지만 각각의 노동의 값은 모두 동일하다. 


   그 노동을 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과 노력의 시간까지 계산하여 그 노동의 자격이 주어졌을 때 대가에 포함되어 돌려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갑질'의 씨앗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화 폐 공동체는 공정한 노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모든 1시간의 노동은 같은 값으로 대체된다. 화폐라는 것이 본래 교환 가능한 가치이므로 나의 1시간의 노동은 다른 이의 1시간 노동으로 대체 가능하다. 밭을 가는 1시간이나 음악을 연주하는 1시간의 노동은 같다. 그것이 발상이 전환이 아니라 당연한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모두가 어떤 자격을 얻기 위해, 노동을 위한 대가 없는 준비의 노동이나 인턴십이라는 이유를 열정을 갉아 먹히는 일이 없이, 노동은 노동으로 삶은 삶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21쪽

주변의 많은 선후배들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한숨과 함께 종종 "할 거 없으며 그거나 해야지" 하는 자조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거나'를 대신할 단어들이 몇 있지만 대리운전은 자주 그 자리를 도맡는다. 그런데 그 대리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그동안 내 주변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 하나의 개념어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화자가 주체성을 포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종사하는 일도 종종 '00질'로 불리는 일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향한 말이 아니더라도 내가 선 자리가 한없이 좁고 남루하게 느껴졌었다. 그냥 삶을 위한 노동을 하고 있으며 노동과 삶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기에 노동을 할 때도 '나'의 일임을 잊지 않으면 나를 녹여내며 그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게 일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그 일이 '00질'로 불리는 순간 내 마음에는 분노보다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나 역시 주체로서가 아니라 사용자의 목적을 나의 목적으로 착각하며 그 대리의 자리가 언제든지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음에 떨려하는 대리사회의 일원이었음을 김민섭의 글을 읽고 나의 글을 쓰는 이 순간 자각한다. 



35쪽

 의사결정권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화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상상과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모두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반론을 내기라도 하면 곧 눈총이 쏟아진다.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총 가운데 가장 효과적으로 사람의 생기를 뺏을 수 있는 총은 눈총이다. 마음이 답답하고 눅진한 공기 때문인지 시간이 너무나 더디게 흐르고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어색했던 회의의 순간들에 대한 답이 이 문장에 있었다. "답정너". 회의를 이끌어가는 의사결정권자에게 수용될 수 있는 대화가 오고 갈 때 회의는 원만하다. 그저 침묵은 그에게 충분하지 않기에 민주주의로 포장되어 모두에게 '발언권'이 주어지지만 수용될 수 있는 언어를 찾느라 분주하지만 결국 내 것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어버버나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재치를 가장한 하나마나한 소리를 내뱉고야 마는 것이다. 가끔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아 적절하게 전달할 기회를 포착하며, 그 순간이 마치 포식자가 먹이를 노리는 긴장감처럼 느껴져 발화의 순간까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지금 생각하니 사자의 포효가 아니라 가젤의 뜀뛰기였던 것 같다. 



52쪽

  호칭에는 듣는 대상의 자존감이나 주체성을 갉아먹는 힘이 있었다. 모든 관계는 호칭에서부터 그 범위가 상상되고, 확장 또는 축소된다. 호칭을 결정할 자유를 빼앗겼을 때부터 나의 신체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운전석에서 내리면서 나를 되찾아온 것이 후련하기도 했다. 



77쪽

  대리사회의 괴물은 개인에게 주체로서 자신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의 눈으로 공간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패배'로 규정한다. 자신을 주체로 믿던 누군가가 밀려나고 나면 그를 잉여, 패배자로 규정하고 곧 다른 대리인간을 세운다.


악의 평범성.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38쪽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이런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라떼는 말이야.


147쪽

도시의 사람들이 대리운전기사를 대하는 표정과 말투에서도 많은 것이 읽힌다. 말하자면 '품격'이라고 해야 할까, 당연하겠지만 그 도시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도시의 격을 결정짓는 것이다. 


격이 맞지 않는다. 격 떨어진다. 


149-150쪽

  낚시터에서의 선문답을 통해 관직을 얻은 강태공은 폭군 주왕을 몰아낸 데 공을 세웠고, 제나라의 제후가 되어 화려하게 고향 땅을 밟았다. 그는 바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 시대를 들어 올렸다. 

  젊은 날의 강태공은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집안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었다. 그가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아내는 홀로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큰비가 왔지만 강태공은 여전히 책만 읽었다. 집에 도착한 아내는 마당에 널어둔 곡식이 모두 떠내려간 것을 보았다. 결국 아내는 결별을 선택한다. 강태공이 만류했지만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집을 나온다. 

  강태공은 제후가 된 자신을 찾아온 아내 앞에 물 한 동이를 쏟아붓고는 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가 얼마나 아내를 원망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173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매장의/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애처롭고 슬프다. 시시포스가 정상을 향해 바윗돌을 밀어 올리고 다시 굴러 떨어진 바윗돌을 바라보는 허탈한 마음이 든다.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일하게 하는 것일까? 강요된 행복과 만족들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 일은 마치 모래알 속에서 사금을 찾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양껏 떠올린 모래를 하염없이 체로 치며 요령을 쌓아봐도 사금은 나올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운이 좋은 누군가는 꽤 큰 덩어리의 사금을 얻어 '나는 인생의 의미'를 찾았노라가 말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인생의 의미 따위 없어. 오직 체만 있을 뿐'이라고 체념하며 체를 놓을 수도 있다. 참 서글프다. 

  나도 누군가에게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말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주인'은 없고 주인'의식'만 있는 곳곳의 노동 현장의 역설이 참으로 파렴치하다. 그 말을 했던 나조차도 주인은 아니고 남다르고 충성스러운 주인'의식'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주인이 아닌 자리에서 의식만은 논하던 그때에 진짜 주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진짜 '주인'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183쪽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갑들은 갑질마저도 을을 통해 시전 한다. 을을 움직일 수 있으며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갑질의 핵심이다. 을은 알아서 절절 매고 '알아서' 몸을 낮춘다. 갑을 대신하여 을을 응징하는 갑의 탈을 쓴 을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갑의 갑질을 대리하는 것일까? 갑의 갑질을 대리하며 마치 갑이 된 듯한 환상에 취해 있지만 그들에게 순간의 갑'질'만 있을 뿐 그 '질'이 끝난 후 돌아온 자리는 변함없이 '을'이다. 



104쪽

  을의 자리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좀'이라는 부사 하나로도 나는 오만 가지 상상을 했다. 많이, 적당히, 조금. 이런 모호한 부사들은 듣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우리는 갑의 자리에서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헛기침이나 하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말조심'은 을이 아니라 오히려 갑이 더 해야 하는 것이다. 


  '말조심'이야말로 갑에게 '갑질'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지도층이라는 품격을 더해주는 기준인 것 같다. 갑질을 할 수 있는 부와 지위를 가졌지만 스스로를 단속하며 '조심'하는 의식을 가진 '갑'과 함께 있으면 주변에 있는 존재들은 '을'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195쪽

가족적 우애가 노동에 대입되는 것은 전근대적인 폭력이 되기 쉽다. 그 과정에서 많은 비상식이 상식으로, 비합리가 합리로 탈바꿈하게 된다. 


213쪽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와 '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N포 세대'로 대변되는 허무와 고독, '노오력'이나 '헬조선'이라는 비아냥과 냉소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차근차근 임계를 향하던 개인의 감정들이 최근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다. 


237쪽

  간편함에 이끌려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잊게 되면, 그 역시 기계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누군가의 절망에도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기계들의 밤이 열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계가 아니다. 나는 '지문'이 있는 한 인간으로서 그 밤을 걷는다. 이 거리에, 사람이 있다. 


  O2O 서비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을 중개하는 서비스이다.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 우리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분명 사람이 있다. 배달의 민족이 주문을 받지만 음식을 만들고 배달해서 문 앞에 두고 가는 것은 사람이다. 온라인이 연결해준 서비스는 1회로 처리가 되지만 그 1회의 서비스에 많은 사람들이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다. 



244쪽

  어느 대학/회사에서는 청소 노동자가 일반 복도를 걸어 다니지 못한다. 그들을 위한 쉼터도 마련되지 않아서 화장실 청소도구실에 숨어서 밥을 먹는다.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요정이 있다.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요정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신체를 지워버리는 것은 결국 우리다. 


  사람은 없고 서비스만 남는 쓸쓸한 풍경이다.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말했던 '물거품'처럼. 육체가 다녀갔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오로지 필요한 서비스만 남겨 놓는 것이 그 세계의 미덕인 것일까? 그 공간에서 쓸모를 다 한 것들과 함께 자신의 신체를 지워버리는 청소 노동자에 대해 생각한다. 비단 청소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녀간 흔적까지 모두 지우고 오직 일만 남겨 두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는 일터는 참 많다.



매거진의 이전글 켜켜이 쌓인 삶과 죽음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