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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May 15. 2022

사악한 놈들이 좀 짠한 면이 있지.

<나의 해방 일지> 11화

짠하다는 말은 그 생김 자체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화자의 의미심장함을 감춘 낱말 같습니다. '짠'은 애잔을 줄여서 표현한 말 같기도 하고, 가슴 한쪽에서 '짠'하고 울리는 감정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안타깝게 뉘우쳐서 마음이 조금 언짢고 아프다'는 의미의 형용사라고 나옵니다. 의외로 '짠'은 언짢음의 '짠'이었나 봅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불편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대상의 모습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불편을 싫어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을 보통은 미워하는데, 그런 상대가 짠하다는 것은 그 미움이 그 사람에게 온당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에게 부당한 미움을 준 것을 안타깝게 뉘우쳐서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고 켕기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정은 정말 기정이 말했던 것처럼 '치아 하나하나까지 모두 미운' 팀장에게 오늘도 까입니다. 그 부당함과 불편함과 억울함에 몸서리를 치지만 해방 클럽이 뭐냐는 질문에 '지긋지긋한 인간들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일갈한 것 외에는 흠씬 패주고 싶은 팀장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얼굴이 뜨겁고, 배가 고프고, 쓰러질 것 같은 미정은 밥이 아니라 '술'이 먹고 싶다고 말하며 어느새 구씨처럼 밥이랑 술을 섞지 않고 깡소주를 마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욕을 해서 시원해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욕을 하지 않으면 사흘이면 사라질 화가 욕을 하고 나면 열흘을 족히 간다.


원래 약한 인간들일수록 사악해. 사악한 놈들이 좀 짠한 면이 있어.



구씨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사악한 인간이었음을, 그리고 그 사악함은 약함의 다른 모습이었음을 알려주려던 것일까요. 그리고 사악한 인간들은 여전히 구씨의 세계를 침범하지만 구씨는 사악한 인간들의 약함을 알기에 그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전에 구씨가 미정에게 "넌 날 쫄게 해. 눈앞에서 네가 보이면 긴장해.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라고 말했던 고백처럼 미정은 사악하지 않기에 그래서 약하지 않기에 구씨를 쫄게 합니다.


https://tv.naver.com/v/26777876


나를 쫄게 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예전에는 눈앞에 보이는 형태에 쫄았습니다. 압도적인 크기나 모습, 학습을 통해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알게 된 벌레, 뱀, 불 같은 것들. 지금은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더 쫄게 됩니다. 한 밤 중에 울리는 소리부터 불길한 전화벨 소리, 멀리서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 혼자라고 안도한 적막한 공간에서 들리는 무거운 발자국 소리, 울음소리.


예전에는 포식자처럼 바로 눈앞을 향해 있던 감각이 초식동물의 감각으로 변해서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로 전진을 위해 앞을 향하던 감각이 앞, 뒤, 옆으로 넓게 퍼져갑니다. 그래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나 봅니다. 혼자 뛰면 잡아먹히니까 남들이 뛸 때 같이 뛰자는 심정인가 봅니다. 포식자인 줄 알고 꿈과 미래의 비전을 좇아 열심히 달릴 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나도 저들과 같이 다소 짠한 면이 있는 초식동물이었습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신이나 자연처럼 거대한 존재의 고갯짓 한 번으로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자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미움이 대상이겠죠. 그도 나를 향한 욕을 하고 나서 사흘을 불편하고 말 것을 열흘 동안 불편해하는 약한 사람이겠죠. 악함과 약함은 점 하나 차이네요.


점 하나를 붙여 '님'이 '남'이 되듯이

점 하나를 붙여 '악함'은 '약함'이 됩니다.


누군가의 '악함'에 몸서리칠 때 당장 욕을 하기보다는 점 하나를 붙여서 '약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나의 감각도 그의 존재도 보듬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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