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꽃 바람 Jul 04. 2022

예술, 어디까지일까요?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블랙피쉬(2022)

독서 모임에서 <방구석 미술관>이 함께 읽을 책으로 선정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발제문을 각자 하나씩 만들어 오기로 하여 저절로 "질문하며 읽기"를 실천하며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질문 없이 그냥 읽었다면 지나치게 되는 대목에서도 어떤 질문이 가능할지 질문을 쥐어짜다 보니 나중에는 온통 질문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넓고 깊은 질문들로 너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게 대해서 다른 분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발제문을 참가자가 각자 하나씩 만들어 오기로 하다 보니 책의 전체적인 내용도 꼼꼼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질문을 공유하신 참여자들에게 성실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책의 어떤 내용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방구석 미술관>은 무려 17명의 예술가가 등장하는 방대한 책입니다. 이들의 활동 장소가 대부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 이어오던 프랑스 파리라는 점과,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기점으로 해서 1, 2차 세계대전을 거친 냉전시기까지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격동기에 예술도 격동했고 우리가 흔히 예술가 하면 떠올리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17명의 예술가는 국적은 다르지만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멕시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오스트리아 빈)를 제외하고 모두가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가장 최근까지 생존했던 인물이 1985년에 사망한 마르크 샤갈이라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 노르웨이)

프리다 칼로(1907-1954 멕시코)

디에고 리베라(1886-1957 멕시코)

에드가 드가(1834-1917 프랑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네덜란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오스트리아)

에곤 실레(1890-1918 오스트리아)

폴 고갱(1848-1903 프랑스)

에두아르 마네(1832-1883 프랑스)

클로드 모네(1840-1926 프랑스)

폴 세잔(1839-1906 프랑스)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스페인)

앙리 마티스(1869-1854 프랑스)

마르크 샤갈(1887-1985 러시아)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러시아)

가브리엘레 뮌터(1877-1962 독일)

마르셀 뒤샹(1887-1968 프랑스)


많은 인물들 가운데 저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했던 예술가는 뭉크, 드가, 쉴레, 뒤샹이었습니다. 


 에드바르트 뭉크(1863.12.12.-1944.1.23.   노르웨이 / 표현주의)는 선천적으로 류머티즘을 앓아 건강한 신체와는 거리가 멀고 늘 아픔과 고통, 죽음이 삶에 찰싹 달라붙은 채 살아야 했습니다. 다섯 살에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열다섯에는 같은 병으로 누나를 잃습니다. 삶 속에서 언제나 죽음을 강하게 인식하는 Memento Mori는 뭉크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이 됩니다.


 뭉크에게는 사랑 역시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생생한 것이 아니라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파멸로 이끌게 하는 비극이었습니다. 첫사랑의 연인은 유부녀이자 화류계의 팜므파탈인 헤이베르그 부인으로 6년간의 기다림의 사랑도 파멸을 맞게 됩니다. 그 이후에 찾아온 두 번째 사랑 역시 친구와의 삼각관계로 엮여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세 번째 사랑인 라르센은 뭉크의 사랑을 너무나 갈구한 나머지 결혼을 거부하는 뭉크를 향한 자살극 끝에 뭉크의 왼손가락을 총알이 관통하는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뭉크는 비극적 사랑과 벗어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작품으로 표현합니다.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고유의 내면과 감정을 흉내 내지 않고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표현주의'라는 예술의 흐름으로 남게 되어 칸딘스키에게로 계승됩니다. 


 뭉크는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지만 <마라의 죽음>을 그릴 당시의 정신 상태는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뭉크 하면 떠오르는 걸작들은 심장을 꺼내어야 하는 자신의 고통을 직면해야 하는 고통의 순간들에 그려진 것들입니다. 중년 이후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에서 요양을 하며 그린 소박한 자연 풍경들은 뭉크를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일까요? 죽음이라는 주제에 몰두하고 그 내면을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라고 말하는 뭉크에게 예술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을 살아가며 죽음을 이야기하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작품으로 표현해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memento mori라는 뭉크를 붙잡은 삶의 화두가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는 죽음에의 공포와 삶의 허무를 인식하며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하고 남기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언젠가 꺼져버릴 생명의 빛이 반짝하는 순간을 내가 표현하여 누군가 기억해 주고, 또한 반짝하고 사라져 버린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기억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을 중요한 삶의 증거가 아니었을까요. 예술가는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표현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뭉크는 고통스럽지만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통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왼쪽부터 <저녁때의 카를 요한 거리>(1892)   <병든 아이>(1855~1866)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1940~1943)


  



  에드가 드가(1834.7.19.-1917.9.27. 프랑스 /인상주의)는 귀족, 꽃미남, 법대에 다니는 모든 것을 갖춘 남자였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법대를 그만두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으면 '오직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완벽한 예술에 대한 갈구를 위해 방해가 되는 사랑은 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예술 속에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세탁부, 여가수, 서커스 여성, 매춘부, 발레리나처럼 신화 속 여신이나 귀부인이 아니라 거리의 여자들을 그렸습니다.

 

   드가의 작품에서 여성이 등장하게 된 계기는 나빠진 시력이었습니다. 서른여섯의 드가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그토록 사랑하는 예술을 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움에 떨며 신경질적으로 변합니다. 고전주의 화풍의 역사화를 주로 그렸던 드가는 시각적으로 완벽한 구현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화풍을 버리고 새로운 기법으로 일상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삶의 좌절이 발레리나의 삶을 보는 인간적인 렌즈를 갖게 한 것일까요? 빈민가의 소녀들이 빈곤을 이겨내기 위한 희망으로 고급 매춘부로 나아가는 창구로 어릴 때부터 발레를 하며 소모되고 버려지는 모습을 알게 되고 이를 그림에 담습니다. <실내(강간)>이란 작품을 스스로 '풍속화'라고 말하며 그 시대의 파리의 슬픔을 표현합니다. 예순다섯에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어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진 드가는 발레리나를 주제로 한 시를 여러 편 쓰기도 합니다. 


  드가는 인상주의자가 추구하는 자연의 '빛'이 아니라 실내 작업을 좋아했다는 점,  빛이 주는 색채가 아니라 인물들의 움직임과 선을 표현하는 데생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인상주의자와 다릅니다. 그러나 '순간포착'에 대한 열정이 기존의 고전주의와 구분되기 때문에 인상주의자로 분류됩니다. 


문득 이런 의문도 들었습니다. 

만약 드가가 부유하지 않고 평생 독신이 아니었다면 거리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나 발레리나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고발하는 작품들이 지금처럼 높이 평가될 수 있었을까요? 

미술 작품을 비평하고 감상할 때 작가의 개인사나 시대상을 생각하지 않고 작품 그 자체만 평가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작품을 그린 것은 작가이고 작가의 의도가 작품 해석에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작가가 본인의 창작 의도를 밝히지 않은 경우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생애를 근거로 하여 작품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예술이야말로 가장 '권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위 있는 평론가의 말을 통해서, 작품을 구입할 구매력이 있는 재력가의 돈을 통해서, 그리고 대중을 사로잡는 미디어의 노출을 통해서 권위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보다는 이러한 권위의 카르텔을 통해서 얻게 된 작가의 브랜드가 소비되고 평가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브랜드가 된 작가의 '목소리'는 더 크고 더 확실한 '권위'가 되어 다시 자신의 권위를 견고하게 합니다. 작가 자신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그에 부여된 '권위'는 스스로 더 단단해지고 폭넓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드가가 이런 작품을 남긴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순간적인 포착이나 빛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그런 장면을 포착하고 '풍속화'라고 표현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발레리나의 삶에 대한 르포를 했던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발레리나의 처지와 그를 애달파하며 시력을 잃었을 때 시를 남겼던 드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드가가 의도한 것이 사회의 변화나 인식의 개선이라면 과연 예술에 그런 힘이 있을까요? 예술이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면 그것은 순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술이 그렇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예술의 순수성이 오염되고 정치의 도구화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드가가 작품에 부여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가 남긴 말은 많지 않습니다. 다만 권위를 가진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멀리 깊게 퍼져나간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그 권위가 시대상이 되고 이미 입을 열 수 없이 땅 속에 묻힌 작가들의 의도가 되어 소비되고 퍼져 나가는 것 아닐까요? 


왼쪽부터 <실내(강간)>1868-1869,    <무대 위 발레 리허설> 1874,      <압상트> 1875-1876.



예술이 얼마나 권위적인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예술가가 있습니다. 

https://youtu.be/7PGMNM9wKrA

  




에곤 실레(1890.6.12.-1918.10.31. 오스트리아 / 표현주의)는 두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일곱 살 무렵엔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그림만 그렸다고 합니다.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매독을 앓고 있었고 이것이 어머니에게 감염되어 아이를 사산하게 되기도 하고, 실레의 누나 역시 선천성 매독으로 열 살 때 죽게 됩니다. 매독 증세가 심해진 아버지는 실직으로 하고 고통으로 발작 증세를 보이며 재산을 모두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에곤 실레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는 고통 속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어머니를 평생 증오합니다. 이러한 삶의 경험은 '죽음을 부르는 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예술 주제로 표현됩니다. 


에곤 실레의 예술은 '자기 자신'에 뿌리를 둡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자기 내면의 모습을 꾸밈없이 그래도 표현하는 것, 솔직함을 넘어선 정직함, 자신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보여주는 것. 에곤 실레는 평생 100여 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깁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을 파멸에 이르게 한 성에 대한 두려움과 성욕 역시 솔직하게 표현하게 됩니다. 왜 유독 성욕만이 금기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사회에 반문하며 누드 작품을 그립니다. 그리고 클림트가 소개해 준 발레리에 노이칠이라는 열일곱 살의 모델과 함께 4년간 동거하며 작품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발레리에가 미성년자였기에 미성년자 유괴와 풍기문란 협의로 체포가 되어 23일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의 표현에 '이성'이라는 필터가 들어가게 되어 조화와 균형을 꾀하는 계기가 됩니다. 자신의 예술에 오명을 씌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세상에 이해시키고자 노력하는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1915년 4년간 함께 했던 발레리에와 결별하고 부잣집 딸과 결혼을 합니다. 실레를 잃은 슬픔에 적십자 간호사로 지원해 살던 발레리에는 1917년 스물셋의 나이에 성홍열로 사망합니다. 실레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스물여덟에 죽게 됩니다. 

왼쪽부터  자화상(1912)  죽음과 소녀(1915) 포옹(1917)


곤 실레의 작품들은 과연 예술이 추구하는 표현의 범위는 어디까지 수용될 수 있는지,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23일간의 감옥살이를 통해서 균형을 꾀하며 옷을 입은 작품들을 내놓은 에곤 실레의 행동은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의 일부를 포기하고 세상과 타협한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외설로 비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자연스럽게 바꾼 것일까요? 


표현의 자유와 예술가의 고유성에 대한 논란은 늘 세상과 함께 답이 움직이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표현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금기'를 금기하는 예술가의 정신, 예술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인 '저항정신'은 예술가의 중요한 정체성이자 순수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표현 자체가 타인의 권위를 침해할 수 있고,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더 예민해져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술가 스스로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외설'이 아닌 '저항'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검열해야 하고 표현의 대상과 대중에게 이해를 구해야 하는 절차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곤 실레가 만약 오늘날 같은 방식으로 작품 작업을 한다면 발레리에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 발레리에에게 동료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 작품에 대한 권리를 공유하는 과정, 발레리에와의 작품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의 일부도 공론화하며 대중과 자기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섬세한 접근과 고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르셀 뒤샹(1887.7.28.1968.10.2. 프랑스 / 초현실주의)은 현대미술을 낳은 혁명적 창조자로 평가받습니다. 뒤샹은 어릴 적부터 체스를 하며 깊은 사고력과 현상의 본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기르게 됩니다. 뒤샹의 친할아버지인 에밀 니콜은 사업가로 성공한 후 예술가로 전향하여 온 집안에 그림을 걸어 두었다고 합니다. 뒤샹의 두 형도 법학과 의학을 배우러 파리로 갔다가 예술가가 되기로 선언을 하고 뒤샹 역시 예술의 길로 들어섭니다. 뒤샹의 형 가스통은 풍자만화가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뒤샹도 형과 함께 풍자만화가로 활동하며 풍자 정신을 깊이 체득합니다. 이 과정에서 테크닉보다 기존의 틀을 깨는 사고력이 미술에서 더 중요함을 간파합니다. 

 

1912년, 아방가르드 예술전에 <계단을 오르는 나체 2>라는 작품을 출품합니다. 그런데 주최 측으로부터 '뒤샹의 작품은 움직임을 표현한 입체주의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추구하는 멈춰져 있는 대상을 다시점으로 분석해내는 입체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전시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당시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모순점을 발견합니다. 새로운 예술을 개척한다면서 뒤샹의 새로운 예술 세계를 선보이는 것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뒤샹의 '안티 미술'이 시작됩니다. 뒤샹은 '팔릴 수 있는 작품'을 생산하기로 마음먹고 창작을 하는 것이 예술가를 억압한다고 보고 팔 생각 없는 자유로운 창작을 시작합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리고 예술 활동은 자유롭게 합니다. 사서로 일하며 서지학에 대해 공부하고 예술과 관련된 많은 책들을 탐독합니다. 이를 통해 '개념 미술'이라는 자신만의 예술관을 창조합니다. 테크닉이 아닌 '머리로 하는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1915년 뒤샹은 '레디 메이드'라고 명명되는 작품들을 선보입니다. '레디메이드'는 예술가가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물들을 '선택해' 예술이 된 미술품들입니다. 그의 이러한 작품들은 이제는 우리에게 큰 저항 없이 예술의 범주로 받아들여지는 팝아트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들며 반향을 일으킨 뒤샹은 1923년 돌연 예술을 접고 체스에 몰두하며 '체스의 거장'이라는 제2의 인생을 삽니다. 79세의 뒤샹은 한 인터뷰에서 "예술가로 살면서 가장 만족한 일은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셀 뒤샹은 비판과 논리력, 그리고 예술 바깥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통찰을 통해서 온 몸으로 예술의 외연을 넓혀나갔던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시장에 있는 작품이 아니라 그의 말처럼 인생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 사랑, 그럼에도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