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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May 30. 2022

그런 사랑, 그럼에도 사랑.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저, 시공사(2021)

  책 재킷을 열면 오렌지색 양장 커버에 저자의 이름과 책의 독일어 제목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킷을 벗었을 때 화사함이 드러나는 책입니다. 


  욕조라는 공간과 '씻는다'는 행위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오브제임을 보여주듯이 굉장히 정성스럽고 온전한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한국어 표지에 등장하는 '욕조'라는 오브제와 '책'이라는 제목이 주는 이질감이 뭔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사진 출처: 토지문화재단


  <책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법학을 전공하고 법학교수로 재직하며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적은 등장인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특징을 가진 저자라고 합니다. 미하엘과 한나라는 두 등장인물을 가지고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한나'라는 비밀스러운 인물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추론과 추리를 통해서 비밀을 파헤쳐가는 추리 소설과 같은 전개를 보여줍니다. 한나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어린 소년인 미하엘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들, 미하엘이 파악하는 수준에서만 제공되는 한나에 대한 비밀의 조각들을 독자들이 함께 맞추어간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미하엘이라는 소년이 마음속에 품은 '한나'라는 인물에 대한 비밀스러움에 독자들도 몰입하게 하고 쉽게 납득할 수 없는 '한나'라는 인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습니다.


   '책'과 '읽기'가 한나라는 인물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문맹이라는 것이 한나라는 인물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 한나와 미하엘에게 어떤 의미의 행동이었는지, 왜 한나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 학살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한나와 함께 법정에서 선 다른 피고인들이 한나가 지칭한 ‘우리’를 격렬하게 거부하며 한나를 주범으로 지목하는 광경은 어떤 의미인지, 한나는 왜 그렇게까지 문맹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며 결국 감옥을 택했는지, 자유를 앞둔 한나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 개인사를 넘어서 시대적 상황과 함께 생각해보며 사실을 넘어선 '진실'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한나와 미하엘의 진실은 그 순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관통하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한 가지 모습의 사랑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흔들리고 색이 바래고 처음처럼 뜨겁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다른 모습의 ‘사랑’이 그들의 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나의 삶에서 한 수많은 무지의 선택들, 자유를 앞두고 선택한 죽음 역시, 한나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271쪽에서 미하엘은 “내가 한 행동과 하지 않은 행동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행동, 그것은 이제는 바로 나의 인생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삶이 없다는 말처럼 한나의 말과 행동, 한나에게 한 행동과 하지 않은 행동들이 미하엘의 인생이 되었다는 말에서 그들의 진실은 ‘사랑’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나름대로 내렸던 답들도 명확해지지 않고 여러 가지 관점들이 더해져서 더 넓게 퍼지고 확산되며 불분명해지는 느낌입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책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드러난 사실들의 퍼즐을 촘촘하게 맞춰보는 과정을 통해서 사실 그 너머에 있는 인물들의 ‘진실’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18쪽
어디선가 세제 냄새가 났다... 언제나 초라하면서도 언제나 깨끗하고 언제나 똑같은 세제 냄새가 풍겨왔다. 

21쪽
그러면 나는 그녀의 모습을 재구성해야 한다. 훤한 이마, 튀어나온 광대뼈, 연푸른 눈동자,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고 통통한 입술, 각진 턱. 넓적하고 준엄해 보이면서도 여성스러운 얼굴 모양새. 나는 당시 내가 그 얼굴을 아름답게 생각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244-246쪽
나는 예전에 그녀의 냄새를 특히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에는 그날 하루의 시간과 노동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하루 일과와 노동의 독특한 향기, 하루 일과과 노동의 종결의 향기 그리고 저녁과 귀가와 집에서 맞는 안온함의 향기 등과 뒤섞여 은은하게 다시 돌아온다.... 한나는 그런 냄새를 풍기기에는 아직 젊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 덕분에 굉장히 논리적 흐름이 자연스러운 글입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정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집요함이 있어서 감탄을 자아내는 이러한 묘사들이 주는 아름다움에도 탄복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한나의 냄새에 대해서 표현한 부분들은 묘사에 대한 치밀함, 작가의 상상력과 장면의 구현이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 감탄하며 읽었던 부분입니다. 




  

  곳곳에 등장하는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문장들이 나오면 두세 번 다시 읽으며 그 의미를 곱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유들이 그냥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사건에 대한 암시이며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철학과 삶의 연결고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습니다. 


31쪽
행동은 나름대로의 원천을 갖고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 

생각과 결정, 행동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일관된 설명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을 통해 한나의 삶에 대한 복선을 제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53쪽
행복이 불행으로 막을 내리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기억 속의 행복은 상황뿐만 아니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먹고사는 까닭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불행으로 막을 내린 행복은 행복한 기억으로조차 남겨질 수 없다는 것을 통해 한나와 미하엘의 단절을 예견하는 것 같습니다.


98쪽
나는 부인(인정하지 않음)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부인을 하는 건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건지, 깊이 사려하는 건지, 난처함과 불쾌함을 비하려는 건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 본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인은 배반의 다른 몇 가지 떠들썩한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토대를 앗아가 버린다. 

부인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는 미하엘이 법정에서 한나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느끼게 될 감정들, 한나가 보인 부인의 행동이 법정에서 다르게 읽힐 수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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