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꽃 바람 May 13. 2022

버러지; 비옥한 존재들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르 (2022)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버러지'라는 낱말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버러지는 벌레에 대한 혐오의 마음을 한껏 담아 상대를 공격하거나 낮추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버러지 같은 인간.

버러지만도 못한 놈.

밥버러지.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버러지'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한낱 '버러지'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이렇게 저희들을 낮추고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줄 안다면 뭐라고 할까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있습니다. 냉철한 통찰과 굳은 심지로 편견에 맞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살충제와 제초제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문학적 풍부함까지 버무려 깊이 있게 전달하는 저자는 버러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926/86538676/1


어두운 토양 속에 존재하는 비옥한 존재들 (78쪽)

끊임없이 애쓰는(80쪽)

토양 생태계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주인공들(81쪽)



가장 오랜 시간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며, 지구의 존재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버러지에 대한 무지와 무시로 인해서 감사와 배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혐오와 거부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수많은 다양성을 가진 존재들을 '버리지'라는 혐오의 명사로 뭉뚱그려 이해하거나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연구하고 해체하고 분석하는 일부 직업군이 있을 뿐, 일상 속에서 우리는 그들을 살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흙 속에서 그 존재들을 발견하고 흥미를 가지려 할 때면 얼굴을 찌푸리고 손사래를 치며 "지지야!"라는 자극을 주어 아이에게 "벌레는 지지야"라는 최초의 인식을 심어줄 뿐입니다. 


각다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56714

모르고 미워하고 하고 혐오하는 일은 인간의 역사에서 숱한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등장하는 호수와 강,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DDD의 살포는 각다귀를 모르고 혐오하여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인간의 무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각다귀는 모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심지어 아무것도 먹지 않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곤충입니다. 낚시꾼들의 편안한 취미생활에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 DDD를 살포해 각다귀를 절멸시키려 한 이유입니다.(71-76)


버러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도,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충과 익충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존재 목적을 성급하게 단정 짓습니다. 생태계의 넓은 그물에서 본다면 그들도 어느 부분의 균형을 담당하고 있는 주인공들입니다. 


인간이 단일 품종을 대량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무너진 균형으로 인해 특정 곤충의 개체수가 급증하게 되어 우리는 그들을 해충이라 부르고 방제라는 이름을 살충제를 만들어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제거하고자 했던 곤충들은 살충제에 내성이 생겼고 우리는 더 강력한 살충제를 뿌렸습니다. 그 사이에 그 화학물질들은 차곡차곡 생물 농축이 되었고 우리의 몸속에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습니다. 또 인간이 뿌린 화학 물질들은 자연 상태의 다른 물질들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반응하여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화학물질을 뿌리고 생태계가 균형을 잡기도 전에 더 빠른 속도 또 다른 화학물질을 뿌리기 때문에 균형은 무너지고 '알지 못함'의 상태도 더 길어집니다. 


고통에는 원근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고통을 가까이에서 느낀다면 인간을 살 수 없겠지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전쟁도, 인터넷 뉴스에 등장하는 타인들의 고통도, 난민들의 고통도 나의 고통보다 멀리 있기에 나는 그들의 고통보다는 훨씬 견딜만한 나의 고통에 집중하여 살만한 힘듦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경에 대한 문제는 먼 곳의 문제, 타인의 문제, 내가 사는 지역의 문제이더라도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 당사의 생사 여부를 위협하지 않는 문제, 나에게 영향은 있지만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거나 애쓰고 싶지는 않은 아직은 견딜만한 문제,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아도 나의 세금이나 열정적인 어느 과학자에 의해 해결 가능성이 열려 있는 문제 정도로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인식은 전부 저의 인식이기도 합니다. 가끔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나라는 세계의 장막이 열리고 더 넓은 세상이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좁고 무지하고 협소했던 인식이 열리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전부처럼 느껴지는 '나의 고통'들을 해결하는데 몰두하다 보면 다시 또 잊게 됩니다. '열림'의 주기가 길어지고 '잊힘'의 주기는 짧아지기를 바라며 자주 읽고, 쓰고, 들여다보려 합니다. 


비가 촉촉이 내려서 그런지 민달팽이가 곳곳에 보입니다. 누군가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 존재들을 바라봐 주기를, 혹시 여전히 버러지에 대한 미움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눈에 띄지 않고 촉촉한 공기를 피부에 가득 머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최대치의 나'를 만나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