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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Feb 02. 2022

시선으로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시선으로부터>_정세랑/문학동네

   나의 첫 번째 정세랑은 [피브티 피플]이다. <유럽책>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수 김윤아가 정세랑 작가를 추천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서점에서 [피브티 피플]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걸어서 서점에 가서 마치 내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듯 [피브티 피플]을 향해 걸어가서 거기서 아끼듯 책을 읽었다. 하루에 5명을 넘기지 않기로 마음속 약속을 하고 책을 읽다가 50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 세계에서 연결되었었는지 연결 지점이 나올 때마다 잠시 멈추게 되는 책이었다. 옴니버스 소설책이랄까, 단편인 듯 장편이랄까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H가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해 준 덕분에 동시에 두 번째 정세랑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의 밑줄을 옮겨 적어 본다. 



이우윤, 13쪽

우리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네,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가보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하지 않았다. 


박화수, 15쪽

이렇게 대단할 걸 그려도 그보다 중요한 정보는 남성 화가의 배우자란 점인지, 지난 세기의 여성들의 마음에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박화수, 16쪽

할머니는 강열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심시선, 21쪽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심서선, 29쪽

파들파들한 신경으로만 포착해낼 수 있는 진실들도 있겠지요. 


홍경아, 44쪽

각기 다른 마음으로 슬펐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면 슬픔이 일상을 지배하진 않았다. 


홍경아, 45쪽

어릴 때는 그 삶을 원했던 적도 있는 듯한데, 이제는 이 삶이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없으니 짐작 불가능한 시간을 저도 모르게 통과해온 셈이다. 


박지수, 54쪽

지수는 화수와 세상 사이의 완충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공기가 든 포장재 같은 것. 인도와 도라 사이의 화단 같은 것. 자동차 문에 붙은 스티로품 범퍼 같은 것. 가족들만 해도 화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가족들이 그래도 다행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던 때는 정말 끔찍했다. 


심명은, 73쪽

지장보살은 원래 여신이었던 거 알아? 원래는 인도의 대지 여신이었대. 흡수되면서 남가자 된 거지. (시선은) 어깨너머. 구제하지 못한 중생 때문에 마음 쓰여서 뒤돌아보는 거야. 동료들끼리 가끔 그런 농담을 해. 모든 사람 챙기고 일 혼자 다 하려는 사람 있으면 그렇게 지장보살처럼 살지 말라고.


심시선, 76쪽

[보현행원품]의 다섯 번째 대원이 수희공덕(隨喜功德)에 대해 늘 감탄하게 된다. 풀어쓰면 다른 사람이 이루는 공덕을 함께 따라 기뻐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질투 없는 마음이 또 있을까?  (중략)  곱씹을수록 근사해서 딸 이름을 수희로 지을걸 하는 생각까지 했다. 


이우윤, 95쪽

죽음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끔은 마주해야 했다. 나는 특별히 용감하지도 않지만 겁쟁이도 아니야. 스스로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박화수, 111쪽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심시선, 116쪽

언제나 소품 취급당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목소리가 있다는 걸 깨닫고 느끼게 된 호감 같은 것이었을 거리고 심시선을 말했다. ... 목소리가 있다는 것, 의견이 있다는 것을 숨기고 싶어서였다고.... 마티아스는 오브제가 말을 하면 견디지 못할 인간이었다. 


심서선, 125쪽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는 말든 살 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심시선, 137쪽

코넬리우스 거리의 그 집에서 나는 다락에, 그늘에 존재했다. 파티의 전과 후에 존재했고 파티 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김난정, 154쪽

하와이는 아름답고 근사해 보여서 왠지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 실망과 안도감이 기묘하게 섞였다. 


김난정, 159쪽

누가 고정시켜서 다행인 역사라고 난정은 감탄했다. 책에 나오는 거리 이름들을 실제로 스쳐 지나갈 때가 있었으므로 삼차원 독서에 가까웠다. 얼추 짐작으로 산 책이 그처럼 취향에 딱 맞을 때 쾌감에 가까운 만족감을 얻곤 했다. 


김난정, 166쪽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야.


정규림, 175쪽

  "언니는 따옴표 같지, 늘 진지하니까. 나는 좀 정신없어서 쉼표 같고, 우윤이는 기본 표정이 물음표이고, 의외로 해림이가 단단해서 마침표고.....너는 말줄임표다, 말줄임표."

  지수가 규림을 놀렸을 때, 규림은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떤 말들은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의 억울해하는 말 같은 것들은. 규림은 천천히 생각했고 그렇게 여과된 것들을 끝내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박지수, 182쪽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박지수, 182쪽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지 몰라도. 어찌 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박화수,  183쪽

좆같은 일이 화수에게 일어났다. 좆같다는 말을 쓰는 사람이 될 줄 몰랐지만 유해한 남성성을 그보다 잘 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욕도 표현의 일종이라고, 다만 정확하고 폭발력 있게 욕을 써야 한다고 말했었다. 


체이스, 204쪽

  "나 , 저 처음 봤을 때부터 확 느꼈는데. 열려 있는 사람이란 거. 튼튼하게 활짝 열리는 창문이나 공기가 잘 통하는 집처럼."


체이스, 208쪽

  "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해.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 "


심명혜, 212쪽

  제대로 따라 하기엔 짧은 시간이었고, 영원히 그 정수에 가닿을 수 없을 것 같아 슬퍼졌지만 그 슬픔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연결되지는 못할 거라는 깨달음 말이다. 


김난정, 234쪽

  "제국주의는 일종의 처리 공정이었던 것 같아. 매번 같은 일이 벌어졌어. 질릴 정도로 똑같은 얼굴이야."

  "계속되고 있어. 교묘할 뿐이야. 좀 더 포장을 잘한 제국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박태호, 273쪽

반대의 언어를 갖추고 있지 않아서 어버버 넘어가버린 것이다. 


심시선, 288쪽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우윤, 290쪽

  보드 밑에서 느껴지는 힘은 우윤이 만나보지 못한 거대한 동물의 일부 같았다. 바다의 힘, 지구의 힘, 모험과 죽음의 힘. 우윤은 계속 계속 나아갔다. 환호하며, 웃으며, 자부심을 느끼며.


김난정, 311쪽

언제가 시선이 픽션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책도 한 권 올리기로 했다. 픽션은 한 권도 쓰지 않았지만 애호가였던 것을 알았다. 



[시선으로부터,] 마지막 문단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사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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