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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Jul 31. 2022

다정한 당신, 내 어깨에 스파이크!

<내일을 위한 내 일> 이다혜 인터뷰집, 창비(2012)

남녀를 가르는 일은 촌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도 여자라는 자각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특별히 '여자다움'을 강조하지 않으셨고, '여자아이'답게 꾸며주실 여력이 되지 않으셨던 탓도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여자다움'에는 비용이 필요했고, 저는 그런 비용 따위는 지불하고 싶지 않음으로 온몸으로 표현하며 짧고 달라붙는 교복 치마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교복은 넉넉하게 맞춰야 오래 입을 수 있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얻어 입은 벙벙한 핏의 치마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내'가 아니라고 나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냥 '나'라고 외쳤지만 마흔쯤 살아보니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손을 거쳐 나의 마음으로 들어온 많은 여성 저자들의 이야기가 내 어깨에 다정한 스파이크를 날리며 "으이그, 이제 알겠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세상을 편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하나의 시선으로 '여성'은 존재하고 있으며,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성'이란 렌즈는 필수적입니다.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발버둥을 쳐도 이미 나는 그 세계에 속해 있으며 알콜 램프의 심지가 알콜을 끌어올려 불빛을 내는 것처럼 내 안에 많은 불빛들 역시 '여성'이라는 심지로 끌어올려진 것이었습니다. 


<내일을 위한 내 일>에도 자신의 내면을 끌어올려 불꽃을 낸 여성들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과장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내는 좋은 인터뷰어인 이다혜 기자와 다정한 인터뷰이들의 만남 속에 오고 가는 대화가 또 하나의 따스한 불꽃이 되었습니다. 


이 멋진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다혜 기자 (본문 29쪽)


5쪽
 
이제 알겠다.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확신하는 제스처가 없이 버티기가 힘든 시간이 올 수 있다는 걸. 좀 알겠다 싶어질 때면 기반이 흔들리는 일이 생긴다. 기회인 줄 알고 잡았던 것은 형체가 없었다. 불운인 줄 알고 주저앉아 울면서 꾸역꾸역 한 일이 쌓여서 후일 큰 성취의 든든한 기반이 되기도 했다.
11쪽

실패한 뒤 방향을 바꾸는 일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길. 오늘의 열심이 내일의 경력이 된다.




< 못 하겠다는 생각은 서랍 속으로 > 영화감독 윤가은

윤가은 감독 (본문 43쪽)
25쪽

그에게는 대화할 때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반응하는 게 연기니까 거기서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건 기술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살아온 모든 걸 걸고 이야기하는 거니까. "

** 윤가은 감독은 특히 아이들의 연기력을 끌어올리는 연출력이 뛰어난 감독입니다. <사루비아의 맛> <콩나물> <손님> <우리들> <우리 집>에 이르는 작품들이 모두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라는 책에서 알게 된 내용인데 특히 '콩나물'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윤가은 감독은 여자 아이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이는 존재들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시선을 담기 위해 카메라의 시선도 말하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촬영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라는 세계, 우리가 이미 지나쳐 왔지만 깊이 음미하지 못해서 그냥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꼼꼼하게 보여주는 윤가은 감독의 시선이 참 다정합니다.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냥 '어리다'는 인식으로 대다수의 어른들의 세계에서 웅크리고 작아져버린 그 세계를 넓게 펼쳐서 보여주는 감독의 영화들은 때로는 놀랍고 때로는 발칙하고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그 이야기를 살아낸 주인공들이 장하게 느껴집니다. 


38쪽

창작하는 직업에는 '재능'이나 '천재' 같은 말이 낭만적으로 따라붙는다. 흔히, 재능이 충분하다면 사람들이 알아봐 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래서 남의 인정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기 쉽다. 하지만, 누구도 내 일에 확신을 주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이 확신을 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행동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 누구나 한 때 한 번쯤은 예술가를 꿈꾼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매료되었던 세계를 내가 직접 창조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저도 한 때 사진작가를 꿈꿨습니다. 고등학교 때 우주를 꿈꾸며 천체 망원경에 대해서 알아보고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국사 선생님께서 만든 사진 동아리에 발을 담그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과학동아리에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비공식 사진 동아리 회원으로 출사도 가고, 용돈을 탈탈 털어 중고 수동 카메라를 사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웠고, 카메라를 들고 가면 익숙했던 장소들이 의미 있는 스틸 컷이 되어 '봉인' 되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삼각대도 없어서 친구와 함께 야간 촬영을 하러 갈 때는 최대한 몸에 카메라를 붙여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노출 시간을 늘려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밤바다 위의 불빛들은 여지없이 흔들려 있었고, 그 흔들림도 멋지다며 의미를 부여했던 참 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작가를 잠시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확신을 얻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행동'에 나설 에너지를 소진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장 나답고 가장 재미있게> - 바리스타 전주연

전주연 바리스타(본문 78쪽)


79쪽

이 사람이 따라 준다면 분명 맹물도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다. 이것은 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감과 확신, 전문성 그리고 환대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 아직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나의 해방 일지>의 여운을 이 문장에서도 느꼈습니다. '추앙'과 더불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던졌던 '환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환대는 영어로는 welcome쯤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떠올린 환대의 이미지는 '달려오는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미소를 머금은 채 아이가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입니다. 


전주연 바리스타의 환대는 그 누가 오더라도 내어주는 변함없이 따뜻하고 맛있는 커피 한잔이겠지요.


84쪽

"대학 다닐 때 셀카 숙제가 있었어요. 사회복지과를 나와서 관련 분야의 일을 하면 몸이나 마음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대할 수 있으니 아침마다 셀카를 찍으라는 거예요.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하라고요. 상대방이 나를 보고 기분이 좋아지도록. 제가 그걸 4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했어요."


**갑자기 셀카를 찍는 지진희 배우가 생각났습니다. 매일 거울 앞에서 셀카를 찍은 지진희. 매일 자신의 오늘을 남기는 일은 추억 남기기나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명상이나 구도에 가까운 행위 같습니다. 늘 머리로 기억하는 나의 얼굴보다 실망스러운 카메라에 담긴 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단순히 나이듦이나 나의 추함을 대면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나' 안에 갇혀서 바라본 적 없었던 나의 겉모습을 바라보면서... 겉모습을 만든 내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간에만 유달리 깊게 자리한 주름을 통해 드러내는 말과 달리 실상은 부정적이었던 나의 내면이나... 잘 웃지 않아서 깊어진 8자 주름을 보며 말로는 많이 미소 짓고 웃었지만 진심을 그러하지 않았던 것 같은...


85쪽

바리스타가 되겠다기보다는 전공을 살리는 대신 카페에서 일하겠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도 반대에 나섰다.

"계속 안 좋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도 힘이 빠지더라고요. 이 사람들을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게 근처에 집을 얻었죠. 눈 뜨면 바로 가게로 나왔어요. 친구들도 안 만났어요."


**이 대목에서 전주연의 힘이 느껴졌습니다. 보통 안 좋은 이야기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면 기를 쓰고 설득을 하거나 몰래 이중생활을 하지 않나요? 그런데 전주연은 "이 사람들을 멀리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이사를 감행하며 적극적으로 멀어집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문장을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세상은 변하고 파도를 타야 한다> - 경영인 엄윤미

엄윤미 경영인 (본문 162쪽)
164쪽

어느 순간부터 성공한 리더들의 인터뷰를 보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조간신문 읽고 등산을 다녀오고 6시면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해요. 누군가가 나를 돌봐 주고 있고 나는 그들을 돌볼 필요가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루틴을, 성공한 CEO는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말해 버리는 건 이상한 일이죠. 사람들이 다양하게 사는 여성들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꿈의 범위가 달라지니까요.

***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누군가 나를 돌봐 주고 있고 나는 그들을 돌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부분은 간지러웠던 어떤 부분을 건드려 주는 문장입니다. '재생산 노동'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며 일터에서 '내 일'을 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문장입니다. 


'성공'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껴집니다. 꿈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 삶을 풍부하게 하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획일적으로 누군가가 심어놓은 꿈의 범위를 사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강요된 욕망을 사는 것이고 '고유성'을 잃는 삶, 기승전'좌절'의 삶이 되기 십상입니다.


165쪽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엇을 주고 싶은지 적어보지 않으면, 온갖 목소리에 흔들리게 되더라고요. 첫 번째는 건강한 몸과 마음이었고, 두 번째는 기본기였어요.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자기 의견을 쓰고 말하는 것.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기본기가 없으면 안 되니까요. 좋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잘 지낼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의사결정을 할 때 그 원칙들을 떠올려요. 여전히 번뇌하지만요.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번뇌는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결정권'을 아이가 온전히 갖기 전에 많은 의사결정을 부모가 하게 됩니다. 기준이 없다면 너무나 흔들리기 쉽습니다. 서점에 가면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쌓여있고 유튜브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문제 행동을 분석하고 부모의 양육 태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격론 하는 프로그램은 시시때때로 나를 덮칩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 기본기, 사람을 알아보고 잘 지낼 수 있는 능력! 세 가지 모두 쉽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즐거운 식사, 충분한 수면, 놀이를 미루지 않는 마음을 주고 싶습니다. 어른이 제가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끼를 먹더라도 입과 마음이 즐거운 식사, 식사를 마친 후에도 불편하지 않은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마무리와 내일의 시작을 연결하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놀이의 순간이 다가올 때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바쁜 일과 중에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즐거움, 아이가 발견한 무언가를 함께 관찰하며 감탄하는 즐거움,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망치더라도 시도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의 마음에 충실하여 몰입하는 즐거움이 어려움의 순간을 돌파할 에너지로 축적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드렁하게 계속하기> 고인류학자 이상희

이상희 고인류학자 (본문 179쪽)
191쪽

다양성은 '립 서비스'라고들 하죠. 다양성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다룬 논문에서 백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분석을 봤어요.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소수자들은 기득권층에게 풍부한 경험을 하게 해 주지만 정작 소수자들이 그만큼 얻는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선의로, 때로는 악의로 기존 시스템에서 튕겨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펼 때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하지 않는 한 '립 서비스'에 그칠 뿐이에요. '보여 주기'인 거죠. 

*** 다양성을 '립 서비스'라고 표현하는 것이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고인류학의 주류 세계에서 비주류로 살아남으며 다양성이라는 '립 서비스'를 몸소 느낀 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미국을 melting pot이라 부르다가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한다며 salad bowl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시스템에서 튕겨나간 사람들은 생기게고 됩니다. 기득권층에게 풍부한 경험을 제공하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가장 값싼 노동력이 되어, 단단한 경제의 밑바닥을 받치는, 결국 주류에 편입하지 못하는, 그저 '립 서비스' 이상의 대우는 받지 못하는 존재. '다양성'이라는 말이 폭력적인 보여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루어

192쪽

다양성이 어디서 시작될까요. 어떤 분야가 전통적으로 백인 남자가 많다면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백인 남자가 많기 마련이거든요. 그리고 당당하게 얘기하죠. 기준에 따라 가장 뛰어난 사람을 뽑았다고. 결국 전통적인 분야가 정통성이 있는 분야로 재생산됩니다. 사람을 뽑을 때 어떤 분야가 필요한지 판단하는 관점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소위 '전통적'이지 않은 분야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그쪽에 다양한 인재가 있어요. 

*** 강자 독식이 '재생산'이라는 구조로 강력한 순환의 고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시스템이 복잡해질수록 정교하게 위장된 강자 독식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통성이 정통성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가장 열려 있어야 할 학문의 분야에서도 비일비재한 것 같습니다. 출판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시장성이 있는 저자의 책은 계속해서 팔리고 기획되고 만들어집니다. 만들어져서 자주 노출되니 다시 자주 팔리고 언급이 되게 되어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요. 다양성이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가치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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