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레이 브래드버리. 황금가지(2022)
이 세상에서 책이 모두 사라져 버린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다룬 책으로 널리 알려진 책입니다. <멋진 신세계>나 <1984>와 자주 비교되며 인간의 생각이 통제되는 미래의 모습에 대해, 미디어의 지배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현재를 예견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은 "작가와 이야기의 탄생"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야기가 필요한지, 이야기가 없던 세계에 이야기는 어떻게 자생적이고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완전히 없애고, 책을 불태우는 직업인 '방화수'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책'이라는 물성은 없더라도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야기를 기억하는 '책 사람들'이 명맥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여행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 자신의 존재를 계승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억'이며,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몬태그는 방화수에서 '작가'로 탄생하게 됩니다.
248쪽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기는 길이니라. 그리고 언젠가는 거대한 굴착기를 만들어 역사에 남을 거대한 무덤을 파서 전쟁을 쓸어 넣고 완전히 덮을 정도로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249쪽
태양이 높이 솟아 올라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면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외울 것이다. 자신들이 아무 탈 없이 존재해 있고, 자신들 머릿속에 든 것들은 절대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위해. 몬태그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말의 소용돌이를 느낀다. 이 여행을 좀 더 쉽게 만들려면,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날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여정이 좀 덜 힘들게 느껴지려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나니. 그래. 좌절할 때와 다시 일어날 때. 그래 침묵을 지킬 때와 말할 때. 그래. 모두 다 그렇다.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이기는 길이라는 말은 참 감동적입니다. 세월호의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노란 리본의 약속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산업재해피해유가족들의 모임 이름이 '다시는'이라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일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억하고 바꿔나가리라는 다짐이 담긴 이름입니다.
54쪽
'사회적'이란 말은 사람마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른 것 아니겠어요?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냥 모여 있기만 해도 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요. 대개는 침묵한 채 고분고분 받아들이기만 해요. 이미 정해진 해답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죠. 감옥의 비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니듯이 이 교실 저 교실을 네 시간이 넘도록 돌아다녀요. 선생님이 보여주며 설명하는 영화들을 보러 말이에요. 이런 데 함께 어울리는 것이 사회적이라니 도대체 말도 안돼요. 수많은 깔때기들을 들이대곤 커다란 물통의 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구 쏟아붓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더러 포도주를 주었노라고 하죠. 학교에서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이면 누더기처럼 축 처진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곧장 침대로 가거나 못된 장난을 즐기기 위해 놀이 공원에 가는 정도지요. (중략) 요즘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사납게들 대하는지 아세요?
102쪽
사람들한테 해석이 필요 없는 정보를 잔뜩 집어넣거나 속이 꽉 찼다고 느끼도록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돼. 새로 얻은 정보 때문에 '훌륭해'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움직이지 않고도 운동감을 느끼게 될 테지. 그리고 행복해지는 거야. 그렇게 주입된 '사실'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나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 돼. 그런 것들은 우울한 생각만 낳을 뿐이야.
당신을 실수할까 봐 두려운 거요. 겁먹지 마시오. 실수란 놈한테서 도움을 얻기도 하니까. 봐요. 내가 젊었을 땐 난 내 무지를 다른 사람들 얼굴에 마구 던졌소. 사람들은 나를 막대기로 후려쳤지. 마흔이 되었을 즈음엔 더 이상 실수가 두렵지도 않았지만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소. 자신의 무지를 감춘다면 아무도 당신을 공격하지 않겠지. 그 대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거요.
237-238쪽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문득 깨달았소. 내가 우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하셨던 모든 일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중략) 할아버지는 우리의 일부였고,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그분의 행동들도 모두 죽어 버린 거요. 어느 누구도 그분이 하시던 대로 그 일들을 해내지 못하오. 할아버지는 중요한 사람이었소. 난 여태까지 그분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오.
"무엇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네 손이 닿기 전의 모습에서 네 손으로 네가 좋아하는 식대로 바꾸면 되는 거란다. 그저 잔디를 깎는 사람과 정원을 가꾸는 사람의 차이란 바로 매만지는 데 있지."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오. (중략)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소. 하지만 만약 내 두개골을 파헤쳐 보면 내 뇌 속에서 할아버지의 엄지손가락이 파 놓은 도랑을 볼 수 있을게요. 나를 매만지셨으니까.
*** 가장 감동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부재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던 일을 똑같이 할 사람이 없고 그 행동들이 죽어 버린 것'이라는 상실의 의미가 깊이 와 닿았습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행동과 말들이 이 세계에서 다시 재현될 수 없습니다. 다만 제 두개골 어딘가에 깊은 기억의 도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마음과 두개골에 어떤 기억의 도랑을 만들고 있는 중이겠지요. 우리의 소멸도 누군가에게 극복하지 못할, 대체 불가능한 기억과 이야기가 되어 남을 수 있게지요. 영원한 삶이라는 것은 결국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