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일
+198일.
2016년 7월 20일 서울에서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던 나는 198일이 지나 2017년 2월 2일 런던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새로운 문화를 배웠으며, 조금 더 내 생각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0. 시작
2016년 1학기 종강 후부터 파리로 떠나기 직전까지 내 정신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비행기표가 예약되어 있고, 교환학생을 가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억지로 떠밀려 떠나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에 기대감이 없었다.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나머지, 그때 내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감사함을 전하지 못했던 미안함이 여전하다.
1. 인연에 대한 인식
막상 파리에 도착하니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두 번째로 방문한 파리는 우연한 인연들이 재미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 파리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 자리에 앉았던 언니도, 중고등학교 동창이지만 아주 오랜만에 파리에서 만나게 된 슬비언니도, 내가 묵었던 에어비앤비 주인 아주머니와 그녀의 딸까지도. 낯선 그 만남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사람 책을 읽는 것 같았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전해주고 있었다.
에어비앤비 주인 아주머니와 그녀의 딸인, 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던 언니와는 매일 아침을 같이 먹으며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머니는 지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이 많이 아프다고 하셨다. 프랑스에서도 이민자에 대한 이견으로 사람들은 분열되고 있고, 남부의 극단적 우파들은 프랑스의 수치라고 하셨다. 난민과 이민자 문제는 아주 작은 가정의 식탁 위에서도 논해질 만큼 일상적이고도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정말 유럽 땅에 있다는 것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2. 시야의 확장
프랑스 남부 생하비에에서 보낸 3주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10명의 친구들과 단순히 함께 이야기하고, 먹고, 일할 뿐이었는데 시간이 아주 잘 갔다. 오늘은 뭘 하고 놀지를 생각하는 것이 유일한 고민이었다. 서로 100% 말이 안 통해도 우리는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재미있었다. 축제 무대 앞에선 춤을 췄고, 밤엔 잔디밭에 누워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와 별똥별을 봤다. 비쥬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친밀한 인사법인지도 알게 됐고, 동네 분들이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해 주셔서 프랑스 가정식을 제대로 즐기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충격적이었던 외국인 친구들의 마인드는 내 시야를 확장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좋으면 좋다고 참지 않고 말하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도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을 하는 것.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현재를 충실히 즐기는 것. 그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남의 시선에 그것을 내맡겨 온 것 같았다. 생각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을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닮아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어느 하나 딱 끌리는 것이 없어 갈 길을 잃었다는 친구의 고민도, 이전 연애의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친구의 고민도,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3. 처음 해 보는 자취
말뫼에 도착했다. 텅 빈 방을 보면서 신이 났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 하나부터 열까지 채워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충만한 행복감이었다. 엄마 아빠로부터 처음으로 떨어져 살아보는 경험은 내가 조금 더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생활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양파를 몇 개를 사야할지부터 내일 학교에서 열린다는 이벤트를 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까지. 그리고 그 책임은 온전히 내가 지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빨래가 되어 있지 않았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노동은 정직했다. 그리고 내 일상의 습관 곳곳에는 엄마 아빠의 흔적이 묻어 있어 놀라웠다.
4. 영어 스트레스
영어 스트레스는 교환 생활 초반의 나를 집어 삼켰다. 생각보다 더 영어를 못하는 나를 보며 당황스러웠다.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수업 시간 교수님의 영어는 그럭저럭 넘어간다 해도 빠르게 오고 가는 친구들 사이의 영어 대화들, 특히 농담들을 따라가기 벅찼다. 영어로 생각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아서 팀플 준비와 팀플 회의를 영어로 하는 것이 어려웠다. 교과서적인 미국식 영어에 익숙했던 나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의 다양한 억양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과 영어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친구들을 질투했다. 정말 답답해서 폭발할 것 같았다.
속으로 힘든 걸 삭히곤 했었는데, 이번엔 입 밖으로 냈다. 힘들다고. 그랬더니 학교 친구들도, 기숙사 친구들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가족들도 모두 나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줬다. 그저 몇 마디 따뜻한 말을 들은 것은 이상하리만큼 내게 큰 힘이 됐다. 힘을 내서 열심히 하기로 했다. 묵묵히 읽어가야 할 자료를 읽고, 팀플 회의에서 내 몫을 해내기 위해 애쓰고, 못 알아 들은 것은 뻔뻔하게 묻고 또 물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지만, 그렇게 5개월을 살고 나니, 영어가 좀 늘은 것 같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해야할 때 적절한 단어나 표현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비스무리하게 해 내고 있다. 온갖 종류의 시험(sit-in exam, take-home exam, oral exam, 그리고 mock trial)도 완벽하진 않지만 무사히 마쳤다.
한 가지 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내가 잘 알고 있고 준비된 부분에 대해서는 영어로 꽤 잘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모의 유엔에 참가하는 것은 내게 큰 도전이었다. 두려움이 있어도 발표하고 토의에도 열심히 참여했더니, 마지막 시상식에서는 Honorable Delegate로 호명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모의유엔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내가 영어를 쓰는 것을 어려워한다고 토로했더니, 친구들은 네가 왜 그런 고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기는 처음 내가 발표하는 것을 들었을 때 저 eloquent한 친구는 누구지? 미국에서 공부했나? 싶었다고 말해주었다. 나와 한 학기 내내 팀플을 같이 했던 캐나다 친구가 우리 위원회의 의장이었는데, 다 끝나고 나서 그녀는 내가 awesome했다며 내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었다.
5. 스웨덴
내가 경험한 스웨덴, 적어도 말뫼는 자유로운 곳이다. LGBTQ 움직임이 활발하고, 그것에 대해 어디서든 이야기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도 정말 많다. 22년 동안 한국에서 본 채식주의자보다 5개월 간 스웨덴에서 본 채식주의자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많다. 어떤 학교 이벤트에 참여해도 일반 채식주의자는 물론, 비건 옵션까지 준비되어 있고, 어떤 음식점을 들어가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있다. 이곳에서 인종 차별은 물론 무례한 캣콜도 당해본 적 없다. 그리고 스웨덴 사람들은 정말이지, 정말 영어를 잘한다.
6. 전 세계의 빽
지금 머무르고 있는 런던에서는 같이 교환 생활을 한 호주 친구 타밍카를 만났고, 스톡홀름에서는 말뫼에서 같이 봉사활동을 한 미국 친구 에이미를 만났으며, 학기 중에는 프랑스에서 같이 봉사를 했던 스페인 친구 실비아네 집에 가서 묵었고, 엄마와 파리 여행을 할 때에는 모의유엔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 사라가 파리에서 가 볼 만한 음식점과 카페들을 추천해주었다. 가족같은 내 기숙사 친구들은 내가 말뫼를 떠나기 전 내게 편지를 써 주었고, 루마니아 친구 베아트리스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 루마니아 디저트를 만들어 주었고, 벨기에 친구 아스트리드는 내게 굿바이 쿠키를 구워줬으며, 인도 친구 데비와 베두시는 내게 인도풍의 선물을 주었고, 중국 친구 리브는 내가 스톡홀름행 기차에 오르기 전 나와 마지막 fika를 즐기고 내가 탄 기차가 떠날 때까지 남아 나를 배웅해줬다.
나는 이제 독일, 중국, 미국, 프랑스, 스페인, 홍콩, 벨라루스, 러시아, 호주, 스웨덴, 벨기에, 인도, 가나, 루마니아에 가면 불러낼 친구들이 생겼다. 그들과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영화를 보고, 여행 다니며 친구가 된 것은 이번 교환 학생 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자산이다. (그들과의 추억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적을 수가 없다!) 전 세계에 내 빽이 생긴 기분이다. 물론 나 또한 그들에게 훌륭한 한국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우리는 2018년 여름 우리 모두의 중간 지점 쯤 되는 태국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같은 학교의 교환학생이 되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과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우리 고대 친구들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다.)
7. 수 많은 여행
그간 나는 파리, 생하비에, 런던, 말뫼, 코펜하겐, 룬드, 예테보리, 밀라노, 헬싱키, 로바니에미, 사리셀카, 부고네스, 포르토, 산티아고, 그다인스크, 파리, 암스테르담, 스톡홀름, 에딘버러, 그리고 런던에 있었고, 14번의 비행기, 약 20번의 기차, 3번의 야간버스를 탔다.
그 여행들 가운데 10일은 엄마와 함께한 여행이었다. 엄마와 여행하던 중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왜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또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기까지 하는걸까.’ 엄마가 질문을 던진 후에야 나도 제대로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 같다. 여행은 하루를 계획하고, 어디를 갈지, 어디를 가지 않을지 선택하고,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어떤 것을 포기할지, 또 어떻게 계획을 변경할 지 고민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여행은 이런 면에서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은 미래를 계획하고,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지 않을지 선택하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땐 어떻게 계획을 수정하고 무엇을 포기할지 고민하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여행을 통해 인생 연습을 조금이나마 해볼 수 있는 것 같다. 엄마와 나는 일단 여기까지 결론을 내렸다.
나는 교환 학생 생활을 하는 동안 꽤 많은 여행을 다니며 인생 연습을 했다. 무엇보다 내게 여행은 내 생각과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해서 먹는지,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지, 어떤 분야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지 살펴보면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8. 혼자가 아니라는 것
엄마는 며칠 전 내게 내 방 청소를 시작한다는 카톡을 보내셨다. 아빠는 공항으로 데리러 오실 것 같다. 내 몸은 아직 런던에 있는데 서울에서 친구들과 잡은 약속도 벌써 여러 개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국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감사하게도. 교환 학생 내내 느낀 것이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내가 다른 시간대에, 다른 대륙에 살고 있지만 나를 늘 생각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갈, 환영받을 자리가 있음을 알려줬다. 마음이 든든하다.
9. 다시, 시작
내가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정말 ‘인터내셔널’한 말뫼로 올 수 있었던 것, 무엇보다 교환 학생의 기회를 얻고 무수한 여행을 다닐 수 있게 지원해주신 부모님이 있는 것은 순전히 내가 운이 좋은 탓이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내게 주어진 행운에 보답하는 길은 이 특혜와 같았던 시간 동안 배운 것을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럴 방법을 생각해 보는 2017년을 보내려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여전히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평생을 살아왔던 곳에서 잠시 유리되어 있는 기간 동안, 조금은 나라는 사람에게 스스로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스물 세 살이 되어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