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따뜻하게.
할머니집에 3박 4일을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까지 나는 방학이면 할머니집에 가 살았다. 나를 예뻐해주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고, 정신연령을 낮춰 나와 놀아주는 막내이모가 있고, 내 유아기의 대부분을 보낸 익숙한 동네가 있었다. 할머니집이 조금 낯선 곳으로 이사를 하고, 집 바깥에서 유흥을 찾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할머니집에 이따금 하룻밤 정도 머물다 올라오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엔 아주 오랜만에 길게 머물렀다. 이틀밤만 자고 오려던 계획이었는데, 그러기엔 할머니집의 바이브가 너무 좋았다.
내가 지내는 4일 동안 할머니집의 옷방은 내 방이 됐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요를 깔고 누워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매일밤이 좋고 편안했다. 할머니집에 가만히만 있으면 나를 해칠 세상의 어떤 일도 당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편식이 심한 나는 할머니의 큰 걱정거리다. 해산물을 일절 먹지 않고, 야채를 즐겨 먹지도 않으며, 고기를 그나마 좋아하지만 또 아주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앞으로 뭘 먹고 살까 우려하신다. 까탈스러운 손녀딸에게 할머니는 끊임없이 “이거 먹을테야?”하고 물어보신다. 제육볶음, 갈비, 감자, 옥수수, 비피더스, 오예스, 커피, 수박, 참외, 토마토, 블루베리, 계란 후라이, 스팸을 먹겠느냐고 물어보는 할머니의 물음에 담긴 애정이 너무 따뜻해서 좋았다. 저 음식 중에서 겨우 절반만 먹어낸 것 같아 죄송하다.
할머니집 거실에서 옷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종이류가 한 더미 쌓여있다. 처음엔 할머니가 재활용 쓰레기 배출을 깜빡하신 줄 알았다. 그런데 일부러 그 자리에 보관하고 계신 거였다. 할머니는 가끔 길에서 만나는, 폐지 줍는 노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현관문 가까이에, 언제든 쉽게 꺼내갈 수 있게 종이류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두신 거다. 그런데 생각보다 폐지 줍는 노인들과 잘 마주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할머니집에 새로운 TV가 생겼다. 내가 가만히 TV 앞에 앉아서 TV 속 연예인의 얼굴 크기와 비교하니, 연예인의 얼굴이 내 얼굴보다 더 크게 보일 정도로 TV의 화면이 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가만히 당신들이 언제 첫 TV를 가졌었나 기억을 더듬으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당신들의 TV가 생긴 때는 TV 가격이 한 달치 봉급과 맞먹을 때였다. 한 달 봉급이 10만원일 때 TV는 9만5천원 정도였다니 말이다. 그 와중에 어머니를 잃었던 사촌동생네 집에도 TV를 한 대 사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러고 보면 우리가 나쁘게는 안 살았어” 하신다.
지난 5월 외가 식구 전체가 함께 여행을 갔다. 당시 나는 진로를 고민하며 학교 경력개발센터에서 매주 커리어 상담을 받고 있었다. 상담 중 과제로 받은 ‘가치관 카드’를 여행 가방에 챙겨 갔다. 가족들과 함께 가치관 카드 활동을 해보고 싶었다. (정확한 명칭이 가치관 카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여러 장의 가치관 카드에는 ‘성취', '인정', '세계 평화’나 ‘상상력이 풍부한', '능력 있는’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자신이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Terminal), 그리고 그 가치를 어떤 ‘액션’을 통해 추구하고 싶어하는지(Instrumental)를 생각해보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말이 적혀있는 카드 3장씩을 골라내면 되는, 꽤 간단한 활동이다.
내가 고른 3장의 Instrumental 카드는 ‘상상력이 풍부한(대담한, 창의적인)’, ‘능력 있는(역량 있는, 유능한)’, 그리고 ‘용기 있는(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이었다.
다들 모여서 뭐하고 있나 들여다보던 할머니는 가치관 카드 활동의 다음 타자가 됐다.
할머니가 고른 3장의 Instrumental 카드는 ‘도움이 되는(타인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용서하는(타인을 용서하려고 하는)’, 그리고 ‘사랑하는(애정어린, 부드러운)’이었다.
20대의 내가 나만 생각하는 사람일 때, 80대의 할머니는 당신의 주변을 돌아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