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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예슬 Aug 20. 2019

준비물은 질문입니다.

당신의 강연 나들이를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

아직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 같다.


나는 장강명 작가를 좋아한다. (작가를 좋아하는 건지, 작품을 좋아하는 건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시작으로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 <당선, 합격, 계급>, <5년 만에 신혼여행>, <표백>, 그리고 <산 자들>까지 읽었다. 잘 읽히는 그의 문체, <그믐...>의 감성, <표백>의 문제의식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무래도 작품을 좋아하는 듯하다.)

그리고 바로 어제! 광화문 북바이북에서 열린 강연에서! 드디어 그 작품들의 작가를 처음으로 영접했다. (줄 서서 사인도 받았다...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사진은 안 찍었다...)


장강명 작가는 한 손엔 전자책 리더기를 들고 양 어깨엔 백팩을 맨 채 북바이북에 나타났다. 유명 소설가지만 이렇게나 소탈한 모습이라니. 알록달록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은 모습은 방에 틀어박혀 글만 쓰는 작가의 전형적 이미지가 아니었다. 사인할 때 보니 장강명 작가는 글씨체도 예뻤다. 섣부른 개인의 우상화는 피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강연을 들으러 갔다면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사진과 약력을 넘어서는 작가의 또 다른 무언가를 보고 오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 걸 보러 강연에 가는 거 아닌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저자나 유명인의 강연을 들으러 갈 것이다. 나는 마침 그 책을 딱 다 읽었는데 저자가 강연을 한다니 궁금해서, 물리적 실체로서의 유명인, 혹은 그의 포스나 아우라 등을 실제로 보고 싶어서 강연에 가곤 한다. (어제 나는 장강명 작가 파마 머리의 아우라를 보았다!) 또 대중매체에서는 잘 접할 수 없는 오프더레코드 이야기를 듣고 싶어 강연에 가기도 한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하자면, 나는 직접 ‘질문’을 하기 위해 강연에 간다.


강연에 가는 건 꽤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우선 각종 알림을 설정해야 한다. 괜찮은 강연은 절대 알아서 나를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온갖 서점들만 팔로우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 계정의 피드를 둘러보다 보면 가고 싶은 강연이나 행사가 종종 내 눈에 띈다. 어제 다녀온 북바이북 강연도 내가 북바이북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에 하는, 내가 가고 싶은 강연을 발견했다면 재빨리 강연을 신청하고 참가비를 입금해야 한다. (잘 찾아보면 좋은 무료 강연도 많다.) 인기 있는 강연은 후다닥 마감되니 빠른 행동이 요구된다. 하지만 입금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애써 신청한 강연을 놓치지 않으려면 날짜를 잘 적어두고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스케줄러 확인 필수!


강연 당일엔 제 시간에, 어쩌면 그보다 30분 전에는, 강연장에 도착해 좋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어제 나는 강연 40분 전쯤 북바이북에 도착했는데, 이미 로얄석은 전부 테이큰된 상태라 놀랐다. 게다가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강연을 흡수해야 하니 적절한 육체적, 정신적 상태도 갖춰야 한다. 휴... 강연 한 번 참석하는 일, 결코 쉽지 않다.

이렇게 고된 강행군을 나에게 의미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남기기 위해선 ‘나만의 질문’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강연이나 컨퍼런스엔 반드시 질의응답 시간이 포함돼 있다. 물론 강연자가 준비해오는 강연의 내용도 (항상은 아니지만 대체로) 중요하고 흥미롭다. 하지만 나는 질의응답 시간이 강연 참석의 꽃, 핵심, 백미, 꿀이라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 질문이나 호기심에 대한 강연자의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책 혹은 저자에 대한 의문은 인터뷰 기사들을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사들이 던지는 질문은 ‘내’ 질문이 아니다. 강연 내용 자체도 여러 방식을 통해 널리 퍼지고 공유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인턴으로 일했던 CSIS에선 매일같이 크고 작은 컨퍼런스가 열렸는데, 전부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 중계됐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곳에 가지 않으면 ‘내’ 질문은 던질 수가 없다.


그리고 나의 짧은 강연 및 컨퍼런스 참석의 역사를 되짚어 보건대, 강연자는 수많은 청중이 지켜보고 있는 그곳에서 되도록 성심성의껏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려고 노력한다. 백날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내기 보단, 강연에 참석해 열정적으로 손을 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나는 어제 장강명 작가 강연에 ‘내’ 질문을 준비해 갔다. “현재의 (착취적이고, 성과 중심적인) 사회, 경제적 구조 속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 안을 자꾸만 맴돌던 질문인데 도통 명쾌한 해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최근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 속 주인공 ‘선이’를 보고 더 고민하게 된 질문이었다.


나는 자존감이란 ‘나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우대한다. 우리는 공부를 잘하면 자기가 애써 찾지 않아도 자존감이 비교적 잘 채워지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공부 못하는 아이에겐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데서 잘하면 되지. 아니다. 이 말도 폭력적이다. 만약 공부 아닌 다른 데서도 딱히 잘하는 게 없다면? 뭘 뚜렷이 잘하지도 못하고, 경제적으로 잘 살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자존감을 찾을 수 있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온 장강명 작가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손을 번쩍번쩍 들었고, 나는 영광스러운 세 번째 질문자가 됐다.


내 질문을 들은 장강명 작가는 조금은 생뚱맞게 들리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답으로 내놨다. 장 작가에 따르면, 자존감은 ‘나 괜찮은 사람이야’가 아닌 ‘나는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어’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 통제의 감각을 자주 경험할수록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데, 요즘 청년 세대는 이전 세대들보다 그 통제의 감각을 경험할 기회가 현저히 적다. 사회가 그런 통제의 여지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선 내 몸에서부터 통제의 감각을 키우는 것을 제안했다. 몸은 노력한 만큼 성과를 보여주는 정직한 지표니까, 일단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꽤나 흥미롭고 납득이 가는 대답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장 작가에게 사인을 받을 때도 그는 내게 “웨이트 트레이닝 화이팅!”이라고 말해주었다. (이 정도면 성덕!!!)


나는 ‘내’ 질문을 준비한 덕분에 하나의 의미 있는 답을 얻어 강연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운동을 하러 나가서는 이 질문과 대답에 대한 새로운 대화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내’ 질문을 준비하자는 제안엔 두 가지 감추고 싶은 진실이 숨겨져 있다.


첫째, 강연자가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질문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할 확률이 크다. (유시민과 김영하 작가를 생각해보자. 강연에 참석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내 질문을 준비해두면, 내가 비록 질문의 기회를 얻지 못할지라도, 내 것과 결이 비슷한 타인의 질문도 유심히 듣게 되고 또 거기서 얻어올 게 반드시 생긴다.


둘째, 어떤 강연엔 ‘내’ 질문 자체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질문할 만큼의 더 깊은 흥미가 없다면, 굳이 질문을 위한 질문을 만들어 다른 청중의 시간을 뺏을 필요는 없다. 나 또한 숱하게 CSIS 컨퍼런스에 참석했지만 질문을 한 적은 없다. 당시엔 내가 집중을 못하나? 영어를 못하나? 나를 자책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국제정치에 대한 내 흥미는 딱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나는 기꺼이 나보다 더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질문의 기회를 양보했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이왕 애써서 간 강연에서 내가 무엇을 더 얻어올 수 있을지 조금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강연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만 듣고 오지 말고, 질문할 기회가 있고 질문할 마음이 있다면, 머뭇거리지 말자는 것이다. 좋은 질문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함께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뜻밖의 풍성한 이야기를 안겨줄 테니 말이다.


어제의 내 질문도 누군가에게는 예상치 못한 좋은 이야기로 남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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