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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Jan 26. 2024

나를 뒤흔든 세상의 문장들 11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에게 보내준 '해방의 밤'

은유 작가는 몇 해 전 '다가오는 말들'과 '싸울수록 투명해진다'로 알게 되었는데,

처음 그녀의 글을 읽고 휘청이고 빠져들었던 그 책장들이

'글쓰기의 최전선', '글쓰기 상담소', '쓰기의 말들'을 거쳐 나를 '해방의 밤'까지 오게야 만들었다.


책을 좋아하지만 다독가는 아닌 내가,

한 작가의 책을 10권 가까이 읽었으니

가히 나에게는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애작가라 할 수 있다.


글을 향한 그녀의 성실하고도 밀도 높은 필력을 알고 나면 골수팬이 되지 않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무엇보다 글만을 위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였다.


그녀의 글은 삶의 응어리로부터 시작되어 사람 사이에,

생의 가장 폭발력 있는 태풍의 눈 속에 살아있는 듯하다.


추상적인 문장이나 수려하고 멋들어진 필체로 뽐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간직하고 싶은 오래된 사진 같은 글.

동시에 또 한 올 한 올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그림 같은 글.


무엇보다 내가 그녀의 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모든 책의 프롤로그들이다.

책 고르기 전 항상 제일 먼저 읽는 게 작가의 말, 프롤로그인데 그게 마음에 안 들면 안 읽는 편이다.

작가의 말에서 독자를 휘어잡고 끌어들이지 못하면

책 본문에서도 내가 얻을 알맹이들이 별로 없었던 경험이 쌓여서 그렇다.


은유작가의 프롤로그는 말이 필요 없다.

한번 읽어보시라. 그러면 절로 빠져들리라.


어쩌면 읽을 때마다 별나게 그녀의 삶과 나의 삶이 겹쳐져서 특히 더 감응이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신간 '해방의 밤'은 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해방! 밤!

작가의 말대로 밤은 '존재의 해방구'이자 '밤이 부리는 마법'이 곧 해방!

곧 있을 북토크를 기다리며 '해방의 밤'을 읽는 밤.

'웅크린 존재의 등이 펴지는 만개의 시간, 밤'.

벌써 해방스럽다.


#은유 #찐팬에서_골수팬으로

#해방의밤 #독서에세이 #창비 #새해독서



이 찬연한 봄날, 슬프지도 않으며 기쁘지도 않았고 다만 감정의 깊은 고요에 잠겼다.

원래 세상엔 이유를 모르지만 일어나는 일이 많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으므로.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고갱의 긴 그림 같은 질문이 눈물로 솟아나는 때가. (16)


책기둥 틈에서 왜 읽는지 목적도 없이,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도 없이, 뭘 써야 한다는 의무도 없이,

그저 책을 무모하게 탐하는 기쁨을 모아두었던 무용의 시간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일이다.

(...) 필연의 책장엔 우연이 발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19)


너무 멀리 가지 말 것. 헛수고와 헛걸음으로 우연 앞에 나를 풀어둘 것.

어디를 가야 자기 존재가 피어나는지 몸은 안다.

10년 후 모습을 만들어가기보다 10년 전 모습에서 멀어지지만 않아도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20)


삶의 질문에 대한 힌트는 대개 두 가지에서 나왔다.

시간 그리고 책. 세월이라고 할 만한 시간이 흘러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21)


비록 앎이 주는 상처가 있고 혼란과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무지와 무감각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무신경함이 누군가의 평화를 깨뜨릴 수도 있으며, 적어도 약자의 입막음이 평화가 아님은 알게 되었다. 더디 걸리더라도 배움을 통한 해방은 내적 평안에 기여하고 낯빛과 표정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해방은 평화를 물고 오는 것이다. (23)


억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무엇이 자신을 억압했는지 보인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가 연장을 내려놓고 펜을 잡는 시간 밤은,

사유가 시작되는 시간,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 다른 내가 되는 변모의 시간이다. (24)



가히 은유작가의 책을 읽기 전과 후로

달라진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글은 내게 많은 자극과 영향을 준다.

그야말로 '니체가 말한 망치 같은 글'이고, '카프카가 말하는 도끼 같은 책'이다.


역시나 이번 책에도 나는 어김없이 '형광펜 파티'로 어지럽다.

좋은 문장 줄 긋고 나면 더 좋은 문장이 후두두 쏟아지니 혼미할 지경이다.

이번 '해방의 밤'에서는 독자를 격하게 공감시키는 글솜씨는 말해 무엇하고,

유독 더 아름답고 세밀해진 표현력이 비에 젖듯이 눈에도, 마음에도 젖어들어오고 말았다.



"펜을 잡는 시간 밤은, 사유가 시작되는 시간,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 다른 내가 되는 변모의 시간이다."


"서러움에서 부화한 문장들은 뜨겁고 아름답습니다."


"자기 안의 두려움이 머무는 곳에서 앎의 깊은 원천을 찾아낸 여성은 자기 자신을 바꿈으로써 사회도 바꾼다."


"사는 방식이 여러 갈래라는 걸 아는 게 해방이죠."


"세상은 안 바뀌는 것 같지만 제가 바뀌었거든요."


"영양이 풍부한 땅에서 햇볕을 충분히 받으며 자라는 나무들도 있지만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도 있다. (...) 여기 없는 아이들은 어디 있을까요."


"자기 부정의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온몸에서 슬픔이란 슬픔"이 모조리 새어 나오고 생의 의지가 차오르는 것을 봅니다."


"저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늘 관심이 갑니다.

엉켜 있고 덩어리진 인간 감정의 복잡함을 최대한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노력이 작가의 임무일 테니까요.

(...)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감정에서 풀려날 수도 있겠지요."



나쁜 글이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가 없는 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자기 생각은 없고 남의 생각이나 행동을 흉내낸 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 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지게 썼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글이다.

- 이오덕



일찍이 '쓰기의 말들'에서 본 이오덕 선생의 나쁜 글에서 언급하는 것들의

낱낱이 정반대가 은유의 글이라고 느껴진다.


무엇을 썼는지 가장 정확한 단어로 고심하여 고른 글쓴이의 시간이 느껴지는 글,

멋들어진 것도 아니고 담백하게 썼는데도

다음 문장이 더 궁금하고 기다려질 정도로 솔직하게 현혹시키는 문장들,

결국은 독자의 마음 가장 숨겨진 곳에 무언가를 건드려 나도 이런 사유를 거친 글을 탄생시키고 싶다는

단단한 씨앗을 심어주는 작가.

응어리진 감정을 결국은 스스로 해소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법처럼 달콤한 은유 작가의 글이다.


우연히 마주친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꾸어 '해방의 밤'을 탄생시켰고,

그 책과 마주한 또 한 사람의 밤은 글'심 부푼' 씨앗이 뿌려져 다른 사람으로 변모되고 있다.

'밤이 부리는 마법' 같은 시간에 글이 부리는 마법이.

과연 '책은 해방의 문을 여는 연장'이었고,

좋은 책에 빠져든 밤은 나를 '해방의 밤'으로 깊이 깊이 데려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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