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 아니고 Anne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본 ‘빨간머리 앤’은 별 기대 없이 보았다가 쏟아지는 명언들을 영어 표현과 함께 주워 담느라 나를 바쁘게 만든 드라마였다. 소설의 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초록지붕 집의 앤)이지만 넷플릭스 시리즈에서는 제목을 ‘Anne with an "E"’로 바꾸었는데, 나는 그것이야말로 앤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앤은 자신을 소개할 때 고집스럽게 이름의 철자에 대해 강조한다. 일반적이고 평범하게 쓰이는 ‘Ann’ 이 아니라, 뒤에 ‘e’를 붙여야 훨씬 품위 있어 보이고 비로소 앤 자신을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항상 자신은 ‘Ann’ 이 아니라 ‘Anne’이라고 말한다. 그래 봤자 발음은 똑같은 ‘앤’이라서 사람들은 앤이 굳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늘 갸우뚱한다.
이 드라마에는 각 인물이 훨씬 두드러지게 묘사되는데, 길버트도 지적인 훈남인 데다가 앤의 친구들도 각각 개성이 부각돼서 소설이나 옛날 드라마보다 훨씬 보는 재미가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조세핀 할머니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언뜻 보면 굉장히 무뚝뚝하고 부유한 독신 할머니인데, 그녀가 앤과 나누는 대사는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적이다.
That is all you really have to decide, Anne, to live a life with no regrets.
네가 결정해야 할 것은 이게 다란다. 앤.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거야.
죠세핀 할머니는 결국 레즈비언인 것으로 밝혀졌기에 그녀가 했을 그 결정이라는 것의 무게는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한편 나는 이 문장이 마치 나에게 해주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실제로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 내리는 선택이 오랜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보았을 때, 혹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인가. 무엇인가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될 때, 거기에서 타인의 시선을 거두고 언젠가부터 혼자서 되뇌는 말이다. 호주행을 결심할 때도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았고, 오고 난 다음에는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호주가 한국보다 좋아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나라에 나를 놓음으로써 생각의 폭이 넓어져서다.
그리고 조세핀 할머니 집에서 하루 밤을 묵고 난 다음날 아침에, 책을 좋아하는 앤에게 할머니가 책을 한 권 주면서 나누는 대사는 이렇다.
Thank you for providing us with such a lovely port in the storm.
폭풍 속에서 안전한 항구가 돼주셔서 고맙습니다.
Books also provide ports in the storm.
책도 폭풍 속에서 항구가 돼준단다.
책을 건네면서 이런 멋진 표현을 쓸 수 있다니! 나에게도 책은 a port in the storm 일 때가 많았다. 거친 파도에 뗏목 하나 타고 갈 뿐 이어도 멀리서 비치는 항구와 등대의 불빛만 보아도, 아니 불빛이 없더라도 곧 안착할 수 있는 항구의 존재 만으로 얼마나 희망적인가. 폭풍 속에서 나를 건져내어 준 것은, 전문 상담사도 아니었고 결국 책과 책을 통한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
빨간머리 앤의 배경이 캐나다라서 그런지 프랑스어도 쏠쏠하게 들려온다. A nom de plume (필명)이라는 단어가 귀에 확 꽂힌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멋진 ‘아농드플륨’을 지을 때가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