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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Dec 16. 2020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박진영의 <썸머징글벨>이 떠오른다 ㅎㅎ 

처음 호주에서 썸머 크리스마스를 경험했던 것이 아마 3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여행을 왔었기 때문에 시드니에 머물면서 근처의 여행지를 하나씩 가보는 정도로 살짝 맛보기 관광을 했었다. 여름에 캐롤이 흘러나오는 것이 영 어색했었고, 페리를 타러 가는 길에 그 더운 날 산타클로스 복장과 모자를 뒤집어쓰고 색소폰을 불러대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보기만 해도 너무 더워서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호주는 한여름에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해서 그나마 땀을 뻘뻘 흘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추운 한국의 크리스마스를 몇 번 더 보내고 올해가 어찌 보면 호주에서 제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첫 해가 아닌가 싶다. 연말이 춥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고 더워지는 날씨여서, 작년에도 올해에도 나는 12월이 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벌써 1년이 다 갔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연말임을 실감한다. 춥고 답답했던 7-10월의 락다운 때문인지 오히려 2020년이 이제야 제대로 시작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은 락다운 때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곳을 다니느라 바쁘다.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산타클로스의 선물. 아이들은 12월에 들어서자마자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받을 생각에 들떠있고, 어른들은 가까운 친구들의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 나도 작년에는 멋모르고 우물쭈물 받기만 했다가 이번에는 선물을 주어야지 생각하고 생각나는 아이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리스트를 적다 보니 너무 방대해져 버리고 말았다. 마치 결혼식 초대 리스트가 길어져서 고심 끝에 커트라인을 정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친구의 범위를 정하게 된다. 맘 같아서야 다 주고 싶지만, 내가 진짜 산타클로스가 아닌 이상 무한정 돈을 쓸 수는 없기에, 좀 더 고민하게 된다.    


크리스마스에 굳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서양에서는 설날이나 추석만큼이나 큰 명절인 만큼, 친구보다는 가족 간의 모임이 주를 이룬다. 어떤 가정에서는 크리스마스 당일은 딱 아이들하고만 간단하게 보내고, 그 전 주와 전전 주에 남편의 가족, 아내의 가족 또는 친척들과 다 같이 모이는 큰 모임을 치르기도 한다. 어떤 집은 가족 여행을 계획하기도 하고, 아니면 사람이 혼잡한 12월에는 조용하게 집에서 보내고 1월에 긴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건 다 비슷비슷 한가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는 ‘명절=여자들의 중노동’이라는 공식이 없다는 것. 차례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음식이 아니라, 가족들끼리 먹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음식 준비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 물론 가족들이 많이 모이니 평소보다는 더 준비를 많이 하겠지만 말이다. 조상님의 영혼이 어디선가 살아서 우리 가족을 지켜준다고 철석같이 믿고 계시는 시댁 어른이 슬쩍 생각난다. 그런 믿음이야 얼마든지 동의해줄 수 있지만, 영혼만 남은 조상님들의 음식을 그렇게나 많이 챙겨주는 것은, 그것도 여자들에게만 요구되는 노동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과한 것이라 여전히 생각한다. 그들의 기준으로 조상님께 음식으로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서양 사람들은 어떤 걸까. 모조리 근본도 모르는 어리석은 놈들인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한다. 잘은 못해도 손수 정성껏 포장하고 그림을 그려 만들어둔 카드에 메시지를 적는다. 선물을 포장할 땐 말려둔 꽃이나 생화를 살짝 꽂아주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줄거라 이왕이면 조그만 사탕 하나를 꽂아본다. 환경을 생각해서 이왕이면 비닐 대신 종이 포장지로, 또 이왕이면 버리지 않고 모아둔 리본이나 노끈을 재활용해서. 트리 밑에 하나씩 선물을 모아두었다가 크리스마스 날 아침 짠~하고 산타가 준 선물까지 합쳐서 차례차례 뜯어볼 아이들의 얼굴이 생각나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처음 혼자 맞는 올 크리스마스는 조용히 한 해를 마감하는 마음으로, 긴 락다운을 보냈지만 잘 이겨내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보내고 싶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답게 낮에는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수영장에나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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