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 우리의 인생은 두번 다시 겹치지 않았지만
<고요한 사건> 백수린
지금도 가능한 지 모르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가능한 일이 있었다.
방송에 출연한 출연자에게 서울시에서 집을 주었다. 공짜로.
아무에게나 막 주는 건 아니고 조건이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님 - 부모님이 안 계신 아이들은 조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학교 공부 혹은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생활한다는 것이 어필되어야 했다.
출연자를 선정하기 위해서는 사전 답사가 필수였는데, 보통은 담당 피디가 가지만 그때는 왜였는지 작가도 함께 동행했다. 아마 장소가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우리가 만나기로 한 주인공은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쯤 되는 여자 아이였다. 엄마 없이 아빠와 중학생 오빠와 살고 있었다. 아이의 집은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하늘 길 바로 아래 있었다. 때문에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말을 멈춰야 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길인지 공터인지 모를 시멘트 바닥 위에 앉아 아이의 아빠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머리 위로 거대한 배를 보이며 지나가는 비행기를 눈으로 좇으면 비행기만큼 거대한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던, 이상한 동네.
아이를 따라 들어간 집안은 더 이상하고 충격적이었다. 그런 곳에 집에 있을 거라고는, 사람이 살 거라고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상할 수 없었다.
아파트 공용 현관문을 지나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을 내딛자, 찜통 같은 바깥공기를 단 칼에 잘라내는 서늘함이 밀려왔다. 전혀 다른 두 성질의 물질이 공기 속에서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지하로 내려갈 수록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다 내려가지 않아도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상상이 가면서도 예측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했다.
계단 끝은 좁은 복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복도 양 옆으로 몇 개의 문이 있었는데 아이의 집만 빼고 대부분 비어 있었다.
아이가 얇은 나무 판으로 된 문을 열었다. 싱크대가 놓여 있지 않았다면 주방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운 공간이 먼저 나왔다. 묵은 떼가 부패한 냄새와 섞여 세간살이 위에 꾸덕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아이는 컵라면을 끓이고 싱크대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이고'만 연발하는 우리에게 아이는 뭐 어떠냐는 듯, 이런 게 무슨 별일이냐는 듯, 이런 삶이 있다는 걸 너희는 이제까지 몰랐냐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염색을 하다 말았는지, 제대로 된 염색약을 쓰지 않았는지, 노랗게 얼룩진 아이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땀과 함께 눌러 붙어 있었다.
아이의 시선을 피해 반쯤 열린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학생 오빠와 아빠, 그리고 아이가 함께 잔다는 좁은 방은 이불과 베개가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밖으로 나왔다.
환경적으로 아이는 이미 방송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한참 동안 아이의 아빠를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의 미래보다 당장, 자신의 체면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는 언덕을 내려가는 우리의 차 뒤를 오래도록 따라왔다. 길 양 쪽으로 불법 주차한 차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어 차가 속도를 내기 힘들기도 했지만, 우리도 쉽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10여 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아이는 이제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비행기가 조금만 낮게 날아도 배에 지붕이 닿을 것처럼 불안하던 그 동네를 벗어났을까. 그때 만약, 어떻게든 방송을 했더라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조금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백수린의 소설 '고요한 사건' 속 해지와 무호의 이야기를 읽다가 오래전 만났던 여자 아이가 떠올랐다. 그 후로 우리의 인생은 두 번 다시 겹쳐지지 않았지만, 비행기가 한 번 지나가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인생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불쑥불쑥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한다. 안녕.
"... 그러나, 또 동시에, 그렇더라도, 나와 무호의 삶이 교차할 수 있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고, 우리는 이제 몇 년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은 겹쳐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