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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할 수 있다

by 이작

지난 2년, 단톡방에 대본을, 기획안을, 편구를 보내 놓고 피드백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고문이었다. 채팅창에 상대방이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뜰 때면, 그 찰나를 견디기가 너무도 두렵고 무서워 이면지에 미친 듯이 욕을 썼다. 20년 넘게 방송작가를 했으면서 고작 이 정도 실력밖에 안 되는 나 자신을 향해, 그리고 정답도 없는 대본에 멋대로 빨간 줄을 긋고 나를 뼛속까지 재단해 대는 당신들을 향해. 이러다 정말 마음에 병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 고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지만.

과연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혼란의 한가운데 서 있을 때는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것만 같고, 이대로 그만두면 다시는 방송작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비굴하게 대본을 고치고 또 고쳤다. 그러다 보면 냉정함도, 객관적인 시선도 모두 마비가 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폭풍우 같던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비로소 차분한 마음으로 이 상황을, 그리고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의 여유는 ‘선택지’에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길밖에 없다고 믿었을 때는 비굴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이 동아줄을 잡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제안이 들어오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이게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 나에게도 선택권이 생겼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벼랑 끝이 아닌 갈림길 앞에 선 지금,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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