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2월 초 방송 예정인 아이템이 잡혔다. 답사도 다녀왔고 기획안도 다 썼다. 그런데 아직 본사의 컴펌이 안 났다. 이유는 앞선 두 팀이 아직 아이템을 못 잡고 있는데 왜 뒤 팀이 벌써 아이템을 잡았냐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에서다. 보통 이럴 땐 아이템을 못 잡고 있는 앞 팀을 다그쳐야 하는 거 아닌가. 일주일 내내, 머리 아프고 눈알 빠지게 아이템을 잡고도 눈치를 봐야 하다니. 참 답답할 노릇이다.
어찌 되었든 이번 주 안에는 컴펌은 날 거라, 아이템이 잡힌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지내고 있다. 아이템만 잡히면 2-3주 간 90% 재택으로 일하는 팀. 편하면서도 무기력증이 오는 시기다. 하루치 시간을 알차게 써야지 다짐하지만, 솔직히 시간 관리를 잘 못한다. 마냥 늘어지고 뒤로 미루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한 주가, 한 달이 훌쩍 지나간다. 그러고 대본 쓰는 3주가 시작되면 미친 듯이 후회한다. 그때 시간을 좀 더 알차게 쓸걸. 그걸 1년 반 동안 반복하고 있다.
이번에 준비하는 방송은 아이템도 내가 찾았고, 주인공도 마음에 든다. 주인공이 마음에 들면 구성할 때나 대본 쓸 때, 확실히 수월하다. 제작 기간도 다른 때에 비해 여유가 있어서, 이야기를 충분히 고민하고 다듬을 수 있다. 그러니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지 말고, 정신 차리고 잘해봐야 하는데. 왜 이러는 걸까.
어제오늘은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를 읽고 있다.
박정민이 추천사에 ‘왜 넷플릭스 보나,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보면 되는데’라고 말해서 더 유명해진 책. 확실히 재미있었다. 그래서 성해나 작가가 더 궁금해졌다.
얼마 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성해나 작가가 한 말 중에, 유독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었다.
[ 그는 단편소설 한 편을 쓸 때 구상과 취재에만 두 달을, 집필에 한 달을 쓴다고 한다. 등장인물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그가 사는 건물의 평면도까지 그려 놓고 글을 쓴다. ‘구의 집’ 작업 당시 그린 주인공 집 평면도에는 화장실과 출입구 위치 등이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빼곡히 표시돼 있었다. ‘벽면 마감: 고급 흡음 벽지, 유공 합판 위에 비닐페인트로 칠함’ 같은 깨알 메모는 건축가의 도면을 방불케 했다. ]
나는 이 정도로 노력했나? 성해나 작가도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쓰는데, 나는 얼마나 깊이 고민했나? 물론 한 번도 대충 일한 적은 없지만 괜히 나를 돌아보게 됐다. (책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번에는 제대로 정신 차리고 해 볼 작정이다. 그러고도 안 되면, 그땐 진짜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