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개인주의자로 살기
요즘 회사 성교육 프로그램에 빠짐 없이 등장하는 단어다. 아마 이 단어를 2010년대 후반 어딘가쯤 처음 들었던 것 같은데,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난해한 단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체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 지도 잘 모르겠고, 잘 끊어 읽은 이후에도 ‘인지’와 ‘감수성’이 대체 어떻게 한 단어에 합쳐질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단어는 오히려 영어로 봤을 때 더 명쾌했다.
1995년 UN 여성대회에서 유래된 이 단어를 한국에서는 성인지감수성으로 번역했다.
‘인지감수성’이라 번역된 말은 센서티브(sensitive)의 명사형, 센서티버티(sensitivity)이었다. 알다시피 이 단어는 민감함 또는 세심함을 의미한다. 무엇에 대한 세심함? 여성다움 남성다움처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성별 기준(gender)에 대해 민감하고 세심한 센스(sense), 즉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결국 성별에 관해 나와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캐치하는 능력인 셈이다.
옛날 사람들은 성적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어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말이 뭐가 문제가 되는지, 그 행동이 어디까지 허용이 되는지 자꾸만 기준을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요즘의 ‘기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그 기준이 피해자의 ‘주관’에 있다는 말을 무척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애초에 이해할 수가 없으니 고작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여자들이랑 엮이지 마.” 같은 수준에 머무른다.
하지만 센서티브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왜 기준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지 알 수 있다. 센서티브는 타인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마음을 민감하고 세심하게 캐치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통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사람은 수용성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쉽게 말해 어떤 언어나 행위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너는 왜 그렇기 예민하니?’라고 대하지 않고 ‘아, 너는 이 부분을 불편해 하는구나’ 하고 캐치하고 존중하는 능력이 결국 성인지감수성이다.
어느 회사나 조직에서든 성희롱, 성추행 등의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세대간 성별간 개인간 서로 기준이 다르니까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조직의 진짜 역량은 이후에 그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말할 때, 그게 왜 불편하냐고 반문하거나, 다른 사람들은 안 불편해 하니 너도 불편해하지 말라고 강요하거나, 그게 정말 불편한 것인지 객관적으로 따져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그 간단한 일을 못해서 사회가 이렇게 대립하고 혐오하며 살고 있다. 이 무수한 혐오들이 어떻게 될는지는 나도 모른다. 모르기에 무섭다.
하지만 분명한 건 시대가 흐르고 있는 방향이다.
절대적 기준, 모두에게 적용되는 객관적이고 공통적인 기준이 아니라 개인화된 기준이 중요해지고 있다.
인터넷에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화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알고리즘으로 최적화된 개인화된 화면을 보여주는 시대다. 그러니까 개인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다.
다만 개인화가 서로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의 기준에 대한 존중을 필요로 한다. 존중한다는 실체 없는 선언만으로는 공허하다. 서로 다른 각자의 기준을 진정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걸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는, 즉 인지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맞이할 개인화 시대는 결국 예민하고 민감하고 세심한 감수성, 센서티버티(sensitivity)를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