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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영 Aug 02. 2023

아침은 곧 오고 강물은 계속 흐르고

결국 시간은 지나간다


언젠가, 나는 서울 모처에 살고 있었다. 이십대에 가장 방황했던 그 시기에 생각은 하루종일 공허하게 떠다녔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패배감은 근처에 사는 친구마냥 수시로 우리집을 드나들었다. 그때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긍정적인 생활태도로, 놀러온 패배감은 작은 집에 던져두고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그러나 도서관에 숨어있는 그 시간이 아니라면 나는 계속되는 인생의 고민속을 방황해야만했다.


그 당시의 내가 남들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냥 젊은 날의 신열이라고 할까. 이미 그 시절을 지나버린 나에게 그때의 일기장속 주인공은 어쩌면 스스로를 안개속에 밀어넣은 뒤 양손을 휘두르며 헤집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언제나 남과 비교하지말고 자기 자신과 비교하라는 격언처럼, 그 시기는 인생 전반적으로 봤을 때 꽤 괴롭기는 했었다. 실제로 증빙자료가 남아있다. 내 기준, 일기를 좋을 때보다 그렇지 못할 때 더 많이 쓴다는 팩트에 기반하면, 그 당시의 일기는 유난히 많고 또 하나같이 어둡다.


어느 날, 어느 잠 못 이루던 밤은 새벽 다섯시까지 이어졌다. 어차피 잠들기는 글렀기에 어떤 목적도 의식도 없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다섯 시, 누군가는 씻고 있었고 아홉시에 문을 여는 도서관 이층의 불은 이미 켜져 있었다. 할머니들은 삼삼오오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차들은 아직 한적한 거리를 마음껏 달리고 있었다.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누군가는 떠남을 준비하고 또 누군가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것이다. 물론 이 시간까지 길에서 술을 마신 아저씨도 있다. 저 연인들은 지금 만난 것일까 아니면 지금 헤어질 것인가? 나는 껴본적없는 그들의 다섯시 풍경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다 아침운동을 하는 어느 중년 부부의 뒤를 밟아 한강 지류를 따라 흐르는 산책로에 도착했다. 굴다리 아래의 거미줄을 걷어내면서 보게된 형식적인 공사장 표어는 “안전은생명.안전은행복”이라 말하고 있다. 삭막하게 느껴지는 그 표어가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생명이니 행복이니 하는 단어들이 어떤 긍정적인 느낌을 줬을지 모른다. 이미 ‘나는 새벽 다섯시에 밖을 돌아다니고 있어. 이 게으름뱅이가!’라는 작은 흥분감에 싸여있었기 때문일지도.


학교 건물 뒤로 뿌옇게, 빨갛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그쪽을 향해 걸어가는 기분은 이상하게 경건하기까지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잠을 못자서 잠시 정신줄을 놓은 것 같지만, 그때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었다. 바람따라 느슨하게 흔들리는 코스모스나 달맞이꽃도 반갑고, 첫 거미줄을 걷어내는 부지런한 이웃들에 대한 근거없는 애정이 샘솟는다. 꽃에 관심없고 사람도 좋아하지 않지만, 몽롱함속에 본심을 숨겨두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힘든 세상이고, 잠못드는 밤이 수없이 이어질지라도 아침은 곧 오고 강물은 계속 흐르고 결국 시간은 지나간다. 단지 참고 견디는 것이 베스트인 시절도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것. 잠깐 나와서 걷다보면 무의미한 것들이 내 인생의 유일한 의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 바퀴를 굴러가게할 기름 한 방울 정도는 되지 않을런지.




사진: UnsplashG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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