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수 있는 길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한가로웠던 때의 나는 시간 속을 허덕이며 어떻게 이 넘치는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매일 고민하였다. 모든 것은 한정적이었다. 돈도 관계도 기분도…. 그러나 시간, 시간만큼은 남아돌아서 어떻게 써도 아까운 줄 몰랐다. 멍하니 누워있기도 했고, 괜히 목적지 없이 가까운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우연히 누구를 만날 법하지 않아 내가 왜 여기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준비할 필요가 없는 생소한 곳으로 훌쩍 가보기도 했다. 저녁때 술 약속이 있는 것은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말했듯이 돈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저녁 약속도 적당히 잡았다. 그 남은 시간은 공허하게 흘러갔지만, 나는 생에 대한, 그리고 젊음에 대한 마지막 남은 죄책감을 끌어모아 매일 책을 읽으러 갔다.
집 앞에는 공립 도서관이 있었고, 그곳에 가면 평일에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다는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리는 책이라도 읽고 있다는 묘한 자기 위안이 서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은 내 착각이었을까. 그때의 기억은 행복한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그래도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감정적으로는 공허했으나 이성적으로 보면 충만한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과학, 수학, 철학, 미학, 영화, 천문학, 역사 등 다양한 지식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간혹 머리를 세게 때리는 것들도 있었다. 맞을 때마다 나는 그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이며 이것들이 죽은 호수 같은 내 마음에 어떤 돌멩이를 던졌는가를 탐구해 갔다.
유명한 시인이 친구에게 남긴 편지글을 읽었고, 살면서 큰 도움이 안 될 수학의 역사에 대해 읽었고,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에 대해 읽으며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세계를 피하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범죄소설에 대해 탐구하는 책을 읽으며 범죄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고, 미학과 영화의 세계에도 더듬어볼 만한 주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교 철학은 당연히 그 시기에 필요한 영양제 같은 것이었다. 천문학 역시 당면한 내 인생을 먼지 한 톨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머리를 써야 풀리는 문제들을 하루 종일 잡고 늘어지면서 마치 창고 구석에 처박아둔, 오래된 기계에 한 번씩 기름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모든 책은 내가 진취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 책을 읽고 더 나은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해야 할 것들은 산재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필코 내 인생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그래서 내 현실에서 필사적으로 도피하고 결과적으로 인생 자체에 대해 쿨하게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저녁때는 글을 썼다. 정체된 삶에 대한 우울감... 글에 드러나기는 하지만 마무리는 비교적 희망적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 그 글들을 보면 마치 분에 넘치는 삶 속에서 외롭다며 우울증에 걸리는 부르주아지 같다. 생각이 많으면 인생이 골로 가는 것의 예시인 것만 같다.
그 시간이 무엇을 남겼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없다. 이상한 교육 방식에 찌들어버린 우리는 언제나 문제와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고, 책 속으로 도피한 것은 도피한 것일 뿐이다. 그 시간 자체에는 의미가 없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려고 애쓰면서 나의 내면이 조금 더 단단해지기는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