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우울한 전화 한 통 받고 어쩔 줄 몰라하다 유튜브에서 좋아하는 음악 계속 듣다 그래도 우울 나라에서 퐁당퐁당 수영하는 느낌 헤어나기 어려워 아들과 스파게티를 먹고 얼른 집을 나섰다. 우울할 때 나의 처방약은 기분 전환하기. 환경을 바꾸면 가끔 도움이 된다. 그래서 목요일 장 보러 가려다 계획을 변경했다. 어차피 장을 봐야 하니까 상관없어. 찬바람이 살을 에일 듯 하니 얼굴이 갈라지는 듯한 추위에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하며 겨울나무 보며 컬리지 포인트 BJ's에 도착했다. 아들은 어제 봤던 영화 이야기하면서 마치 한국 드라마 같더라고 하고 주택가 도로는 공사 중이라 보행자가 걷는 도로가 막혀 있었다. 마트에 도착하니 에드 시런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마트 화단에 핀 장미꽃은 잠들어 버렸어. 여름이 되어야 장미꽃이 피려나. 여름을 기다린 이유 하나가 장미의 계절이라서.
입구에서 붉은색 회원권 카드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물품을 수레에 담았다. 잊지 말아야 하는 품목 커피는 가장 먼저 수레에 담고 다른 마트보다 더 저렴한 육류 코너에 가서 소고기와 돼지고기 담긴 팩을 골랐다. 크로아 쌍 빵도, 달걀도, 아보카도도, 샤워 비누와 샴푸와 린스도, 스파게티 소스와 토마토케첩 등등. 계산대에서 직원에게 할인 쿠폰 두장을 주고 몇 불 할인 혜택을 받았지만 수 백 불이 넘는 가격. 물가가 정말 많이 올랐어. 세금은 약 6불을 냈어. 그럼 대부분 세금 없는 물품을 구입했다는 의미. 그런데 왜 이리 비싸.
집 근처 한인 마트보다 가격이 훨씬 더 저렴하지만 포장지에 담아주지도 않아 직접 빈 박스 찾아 담아야 하는 미국 서비스 제도. 서민들은 이런 제도에 익숙해야지. 한국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서비스. 코너에 빈 박스 남아있으면 행운이야. 가끔 빈 박스도 안 보여. 그럼 어떡해? 그냥 수레에 담고 트렁크에 옮겨. 그 후가 문제. 아파트에 엘리베이터도 없어.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하나씩 짐을 나르는 수고를 즐겁게 해야 해. 빈 박스 찾으면 아들이 레고 장난감 맞추듯 빈 박스에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를 하고 난 그동안 한인 택시를 부른다.
오늘 만난 한인 택시 기사는 30년 전에 호텔경영학 공부하기 위해 오셨다고. 뉴욕 생활 어떤지 묻자 책임감으로 그냥 살아요,라고 하셔. 전라도 고흥출신이라고 뉴욕에 시골 출신도 거의 없고, 고향 친구도 없어서 27세 뉴욕에 왔지만 고아 같다고. 가끔 JFK 공항에 손님 픽업하러 가면 손님들은 한결같이 뉴욕 생활이 어떤지 묻는다고. 그럼 그분은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 생각하면 돼요. 다른 나라에 와서 사는 게 어찌 쉬워요. 자국민도 어려운데 언어 장벽도 높고, 문화도 다르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나라에서 새로운 삶이 어찌 쉽냐고. 장남이 아니라서 부모님에게 더 큰 세상 보고 싶다고 말하고 유학을 떠나왔다고. 쌍둥이 딸과 아들 세 자녀를 둔 기사. 과거 미국에 사면 제도가 있었다고. 기사 말에 의하면 10년마다 사면 제도가 열려 비자 문제를 해결했다고. 불법으로 미국에 들어온 사람은 혜택이 없고 이민국에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 쉽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어서 그분도 뉴욕에 남아 지낸다고. 지금 사면제도는 사라지고 없어. 지금은 한국보다 뉴욕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아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어느 나라가 더 좋은지 말하기 어렵다고. 50대 중반이지만 책임감으로 산다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했다. 요즘 책임감 위해 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개인주의가 발달한 세상으로 변했어. 과거는 '장남' '책임감' 이런 용어를 사용했다. 한인 기사가 요즘은 부모 돌아가시면 형제들도 만나지도 않아요,라고 해. 자식들은 재산 분할에 관심 갖고 그 후로 만나지도 않는다고. 한인 기사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집 앞에 도착해 우리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멀리서 보면 이민 생활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이민 생활이 아름답지는 않아. 힘든 이민 생활을 견뎌낸 사람도 있고 빨리 짐 싸서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다. 오래오래 전 베트남에 여행 갔을 때 한인 가이드가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해서 베트남 아가씨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기도 하고 돈 벌기 위해 한국에 갔지만 막상 한국에 들어가면 모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사는 게 아닌 힘든 현실을 마주한다고.
소수 돈 많은 사람들은 외국에서 화려하고 멋진 삶 살기도 하지. 가난한 사람이 어느 날 미국에 와서 하루아침에 부자 되기 어려운 세상이다.
이민 생활이 결코 화려하지 않은데 한국에서는 힘든 이민 생활을 잘 모른다. 최근 올린 '미국 이민 다양한 사례' '뉴욕에서 만난 한인 택시 기사들' '뉴욕 한인들/ 간호조무사, 목사, 미용사, 네일숍, 운전 강사, 우체부' 포스팅을 약 92000명(브런치 읽은 숫자)이 읽은 것으로 보아 이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느껴진다. 직접 만나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적은 거라 뉴욕 이민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내용이다.
뉴욕 생존기 네이버 블로그 본 사람들로부터 자주 이민과 유학에 대해 상담을 받았다. 미국 현실을 너무도 몰라 당황한 적이 너무나 많았어. 한국에서 직장 구하기 힘들면 뉴욕에 오면 쉽게 직장 구해. 역시 너무너무 어려워. 영주권만 받으면 그래도 괜찮다. 힘든 이민이라도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그런데 영주권 없는 이민자 생활은 노예 수준이지. 최저 임금 받지도 못하고 지낸 자들도 너무 많고 최저 임금 받아도 뉴욕 렌트비 지불하기도 힘든데 뭐가 장밋빛이야. 후세를 위해 참고 견디고 지낸 자들이 대부분이지. 미국 보통 이민자들 삶은 한국 외국인 노동자 삶과 비슷해.
뉴욕에 오기 전 만난 중국어 강사는 중국 베이징 출신. 원래 수학 교사였는데 한인 유학생 만나 한국에 대한 환상을 갖고 왔는데 한국 문화를 전혀 모르고 와서 너무너무 고통스럽다고 울었어.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중국 베이징 친정에 가슴 아픈 이야기도 꺼내지도 못한다고. 왜? 스스로 결혼한다고 선택했는데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기 너무 어렵다고. 강사 남편이 장남이고,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도 함께 모시고 산다고. 그럼 3대가 함께 살고 살림 등 전부 중국인 강사 책임이라고 하니 나도 깜짝 놀랐어. 연예인처럼 야리야리하고 미모의 얼굴인 강사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그분도 한국 드라마 영화 보고 한국 가면 모두 잘 살구나 착각했다고. 미국도 마찬가지다.
집에 도착해 장본 물건 정리하고 작은 비닐봉지에 1회용 먹을 분량으로 담아 냉동고에 넣은 후 커피 마시며 메모 하기 시작했다.
메트 오페라 러시 티켓은 이미 매진. 어제부터 줄리아드 학교에서 챔버 뮤직 페스티벌 열리는데 티켓 구매해야 하니 눈 감아야지. 티끌 모아 태산. 한 달이 되면 엄청 나. 작년까지 1월 중순에 열리는 줄리아드 학교 챔버 뮤직 공연 봤는데 이제는 머나먼 님이야. 그뿐 만이 아냐. 사랑하는 링컨 센터 공연 예술 도서관 이벤트도 기부금 제도로 변하니 큰 일이야. 프라이빗 도서관도 아닌 공립 도서관이 그러면 어떻게 살아. 갈수록 서민들이 살기 힘든 뉴욕. 새해 되면 렌트비와 물가 인상되고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른 시절 새해가 좋았지.
보스턴 찰스 강은 꽁꽁 얼어붙었다고. 캐나다 토론토는 주말 영하 19도까지 내려간다고. 주말 뉴욕도 꽁꽁 얼어붙을 거 같아. 하얀 눈도 펑펑 올려나.
오후 4시가 되어가자 서서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얼마 전 4시 반이 되면 석양이 지곤 했는데 오늘 4시 53분이라고 구글에 나와. 점점 해가 길어지고 있어. 추운 날 장 보러 다녀왔지만 아직 김치도 사야 해.
대학 시절 자주 들은 조동진 노래 다시 들어봐. 목소리가 참 슬퍼. 그 시절 내 운명이 이리 슬플 거라 미처 몰랐지. 끝도 끝도 없는 문제들이 날 감싸고 있어. 언제 이 폭풍우를 벗어날까. 겨울비 쏟아지고 폭풍우 부는 나날. 언제 침묵의 바다를 깨뜨릴 수 있을까.
1. 15 화요일 오후
계산대에 도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