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필 4월 호에 실린 나의 수필
<꿈과 나>

by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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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청춘이 언제였던가

빛나는 청춘이 언제였던가

꿈 많던 청춘이 언제였던가

아무도 없는 길을

오래오래 걸었지

눈만 뜨면 꿈을 찾아 걸었지.

언젠가

꿈나라에 도착하겠지

무지갯빛 가득한 세상에 도착하겠지



꿈 많던 대학 시절 방황을 했다. 세상은 온통 어둠이었다. 캄캄한 현실과 이상 속에서 방황을 했다. 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몰랐다. 내가 원하는 길은 보이지 않았고 오래오래 어둠 속에서 달렸다. 책을 읽으며 어딘가에 길이 있겠지 꿈을 꾸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꿈 많던 대학 시절은 어디로 간 데 온데 없고 하루하루 죽음 같은 노동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시외버스를 타고 직장에 출근했다. 수업을 마치면 버스 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하루 왕복 4-5시간 버스를 탔다. 학교에 출근하면 쉬는 시간 없이 교재 연구하고, 수업과 보충 수업을 하고, 담임도 맡아 사무도 많고, 그 외 다른 일도 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고된 노동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음악 사랑은 대단했다. 초등학교 1학년 처음 본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공무원 급여받아 근근이 생활하던 부모님께 바이올린 레슨 받는다고 차마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대학 졸업 후 발령을 받아 첫 급여를 받았을 때 악기점에 달려가 연습용 바이올린 하나를 구입했다. 내 품에 사랑하는 바이올린을 품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의 바이올린 레슨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집에 돌아오는 고된 일과 속에서도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아름다운 청춘 시절 만난 그와 어느 날 약혼을 하고 결혼을 했다. 세월이 흐르자 딸과 아들을 출산을 했다. 두 자녀 출산 후 고민 끝에 두 자녀 양육 후 다시 내 길을 간다는 조건 아래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집에서 자녀 교육에 전념했다.


두 자녀에게는 5-6세부터 피아노 레슨을 시켰고 딸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했다. 아들은 누나가 바이올린 연습하는 것을 보고 기어코 배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레슨을 시켰다. 두 자녀 바이올린 레슨을 하던 선생님은 두 자녀 재능을 알아보고 특별 레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어려운 형편이라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지만 강력하게 주장하는 선생님 덕분에 두 자녀는 개인 레슨을 받게 되었다.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자녀 교육은 쉽지 않았다. 세상이 급변하기 시작했고 교육 역시 변하고 있었다. 음악 전공도 하지 않아서 특별 레슨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 방과 후에서 시작한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이 몇 차례 바뀌었다. 독일에서 공부한 분에게 레슨을 받기 시작하고, 나중 빈 대학 바이올린 교수님에게도 레슨을 받고,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한국에 방문하면 두 자녀가 레슨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


특별한 길을 가던 아이 아빠 내조도 무척 힘들기만 했다. 어느 날 운명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길고 긴 뒷바라지 끝에 드디어 경제적 자유를 누릴 시기가 찾아왔지만 우리 집에 폭풍우가 불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중년의 위기가 찾아왔다. 대학 시절 프랑스 작가 시몬느 드 보브와르 <위기의 여자>를 읽으며 중년을 맞이하는 여자의 위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내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할 때도 어렵게 결정을 내렸지만 내게도 피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왔다. 어느 길을 가야 할지 갈림길에 섰다. 로버트 프로스트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어느 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힘든 결정이었다.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뉴욕에 왔다. 아무도 없는 땅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삶은 지옥의 불길처럼 뜨거웠다. 뉴욕에 어린 두 자녀 데리고 간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모두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했다. 그랬다. 낯선 지리, 낯선 언어,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속에서 우리 가족은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익숙한 것과 결별이 유학과 이민이던가. 두 자녀는 자녀대로 학교 과정이 힘들고 나는 나대로 대학원 과정이 죽음처럼 힘들기만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한인 학생 한 명만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없었다. 매일매일 눈물을 뿌리며 희망과 꿈나무를 길렀다. 대학원 과정을 졸업하고 미국인 회사와 뉴욕 시립 대학 연구소에 취직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시련과 역경이 찾아왔다. 어느 날 직장을 잃고 말았다.


수많은 이력서를 보내고 취직이 어렵다는 것을 파악했다. 십여 년 전 가을 맨해튼 음대 예비학교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소속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갔다. 고등학교 학생들 공연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뉴욕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과 문화 차이를 느꼈다. 그때 처음으로 맨해튼 음대 공연을 일반인에게도 오픈한 것을 알게 되었다. 1년 약 700회 이상의 공연이 열리는 음악 학교. 일부는 유료 공연이지만 무료 공연도 많아 마음껏 클래식 음악과 재즈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뉴욕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줄리아드 학교 역시 1년 약 700여 개 공연이 열린 것을 알게 되었다.


실직자로 변하니 시간이 넘쳤다. 공부하고 직장에서 일할 무렵 뉴욕이 뭔지 몰랐다. 어느 날부터 낡고 작은 가방 하나 메고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출근했다. 집에서 맨해튼까지 왕복 최소 3-4시간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달린다. 매일 낯선 곳을 찾아다녔다. 하나씩 둘씩 새로운 세상에 노출되며 새로운 문화에 노출하며 적응이 되어갔다. 맨해튼 반스 앤 노블 북 카페에서 낯선 뉴요커랑 이야기를 나누고, 축제를 보러 가서 낯선 뉴요커와 이야기를 나누고, 줄리아드 학교에 가서 낯선 뉴요커와 이야기를 하면서 차츰차츰 뉴욕 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점점 나의 세상은 커져만 갔다. 뉴욕에 올 때 아무것도 몰랐다. 시간이 흘러가니 뉴욕이 세계적인 문화 예술의 도시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카네기 홀에서 고등학교 시절 사랑하던 빈 소년 합창단 공연을 보고, 카네기 홀에서 대학 시절 자주 듣던 안네 소피 무터와 크리스토프 에센 바흐 공연을 보고, 대학 시절 '음악 동아' 잡지에서 보던 줄리아드 학교가 나의 놀이터로 변하고, 맨해튼 북 카페에 가면 커피 한 잔 마시면 종일 책과 잡지를 무료로 읽을 수 있다. 신간 서적을 무료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대학시절 읽다 던진 '뉴스 위크'와 '타임지' 잡지도 읽을 수 있다. 그때는 글씨가 너무 작다고 불평을 했고 모른 단어가 투성이라 몇 줄 읽다 던져버린 경우가 많았다.


명성 높은 음악가, 작가, 화가, 영화감독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뉴욕에 찾아온다. 그뿐이랴. 뉴욕에 셀 수 없이 많은 뮤지엄과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있다. 마음껏 전시회를 감상할 수 있다. 맨해튼 한복판에 센트럴파크가 있고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 봄이면 수선화와 벚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축제가 열리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아름답고, 하얀 눈이 내리면 동화의 나라로 변한다. 뉴욕 공립 도서관도 너무 멋지다. 링컨 센터 공연 예술 도서관에서는 뮤지컬과 오페라와 앙상블 공연도 보고 전시회도 볼 수 있는 공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도서관이다.


대학 시절 꿈을 꾸었다. 많은 책을 읽고 전시회를 보고 공연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뉴욕은 대학 시절 내가 꿈꾸던 도시란 것을 늦게 알았다. 꿈이 없었다면 난 결코 뉴욕이 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릴 적 읽은 롱펠로 시 <화살과 노래>가 생각난다.


하늘을 향해 나는 화살을 쏘았네

화살은 땅에 떨어졌으나 간 곳을 몰랐네

너무도 빨리 날아가 버려

눈으로도 그 화살을 따를 수 없었네.


하늘을 향해 나는 노래를 불렀네.

노래는 땅에 떨어졌으나 간 곳을 몰랐네

눈길이 제아무리 예리하고 빠르다 한들

날아가는 노래를 그 누가 볼 수 있으랴.


오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느티나무에 부러지지 않고 박혀있는 화살을 나는 보았네

그리고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친구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을 나는 알았네.




1. 21 마틴 루터 킹 데이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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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한국 수필에 보낸 <꿈과 나> 수필이 실린 한국 수필 4월호를 얼마 전 받았다. 남들이 모른 아픔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으며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나의 최선을 최선을 다해도 언제나 부족한 엄마 역할을 해서 두 자녀에게 언제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대학 시절 꿈꾸던 세상을 수 십 년이 지나 뉴욕에 와서 보지만 우리 가족에게 미국 생활은 아픔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 아픔과 어둠 속에서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노라면 어제 보다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릴 거라 믿는다. 언젠가 우리 가족의 아픔과 상처는 사라지고 꿈나라에 도착할 날을 기다려본다.


4. 18 목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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