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고

by 김지수



어젯밤 아들과 잠들기 전 대화를 나눴다. 갑자기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만약 돈이 무한이라면 무얼 하실래요?

난 대답 대신 웃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계속 나왔다.

아주 오래전 영어 학원에서 함께 수업을 듣던 지인이 내게 말했다. 내가 가진 게 돈 밖에 없다고.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던 넓은 평수 아파트에 살고 독일 수상이 운전하는 차를 갖고 있다고 대학 동창이 내게 말했다. 그 아파트를 떠나 다른 나라에 와서 살고 있다. 그때 난 돈 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나의 무엇이 그렇게 보였을까. 영어 학원에서 난 언제나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타입이었고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집에서 지내면서 두 자녀가 학교에 가자 비로소 영어 학원에 갈 수 있었고 평상복 차림의 난 남의 눈에 띄지도 않았다. 함께 수업을 듣던 사람들은 영어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난 그들처럼 영어에 대한 열정이 많지 않았다. 내게 돈 밖에 없다고 말한 지인은 같은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두 자녀의 아빠 사회적 지위에 알고 있었으나 난 밖에 나가서 두 자녀 아빠의 직업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편이었다. 나는 나이고 난 언제나 내 삶을 온전히 가꾸고 싶다는 생각이 변함없기에. 당시 매일 운동하고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첼로 레슨을 받고 아마 방통 대학에서 중문학 수업을 듣던 시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고. 책을 사랑하는 나의 집 가장 큰 방은 사방 벽면이 책으로 싸여있고 난 세상 사람들로부터 "돈밖에 없어요."란 말을 듣게 될 줄 감히 상상도 못 하였다. 하긴 지금은 그런 말을 들을 처지가 아니다. 그때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겠다. 돌아보면 추억이고 웃음이 나와.

한국과 뉴욕의 문화 차이는 아주 크고

사십 대 중반 뉴욕에 와서 새로이 시작하는 삶은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실험적일 수밖에 없다.
누가 내 삶을 이해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보통 사람과 가는 길이 너무 다르다.
뉴욕은 어릴 적부터 내가 꿈꾸던 도시다. 생각으로만 머물렀던 일이 하나씩 가능한 도시다. 아름다운 문화 예술의 도시가 주는 매력이 내겐 참 크다. 지하철을 타고 달리면 내가 사랑하는 공간에 머물 수 있다. 지옥 같은 현실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게 많아서 뉴욕에 살고 싶다.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이다. 맨해튼에 자주 가서 사진을 찍고 블로그와 브런치에 올리는 작업이 그 무엇보다 시간 싸움이었고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인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글을 쓰고 사진 작업하는 일을 수 년째 하고 있고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왜 난 좋은 카메라도 없는데 사진을 찍고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뉴욕 문화가 주는 매력에 빠지고 난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라. 너무너무 힘든 일이라 올해는 사진을 안 찍어야지 했는데 다시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하루에 1장을 찍어도 1년이면 365장의 사진일 텐데 난 거의 매일 맨해튼에 가서 특별 이벤트를 보고 사진을 담는 일을 해왔으니.

누가 짐작을 할까. 내가 1주일에 몇 시간 노동을 하는지. 어제 아들이 엄마 보고 말했다. 엄마 집안일하고 맨해튼에 가서 이벤트 보고 기록하는 시간 전부 합하면 월가 직원만큼 일한다고. 월가 직원처럼 수입이 많다면 좋겠지만 수입은 제로.

랩톱 용량이 한계가 있어서 다 버려야 할 시점이고 그래서 지난 1년을 사진을 보며 거꾸로 필름을 돌리고 있다. 버리기 전 내게 소중했던 사진을 기록하는 작업을 며칠째 하고 있고.

1년 동안 맨해튼에 가서 정말 많은 이벤트를 봤다. 꽤 많은 곳에서 예약을 요구했고 어쩔 수 없이 이메일 주소를 남겼다. 연말이 다가오자 그 많은 곳에서 내게 기부금을 달라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아들이 공부한 맨해튼 음대도 보내오고 나도 기부금을 낼 정도로 형편이 좋으면 좋겠다.

아들과 내가 사랑하는 스타 셰프가 운영하는 장 조지 레스토랑에서 크리스마스이브와 새해 이브 식사하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1인 식사비가 165불이다. 그럼 팁과 세금을 내면 두 사람 식사하는 비용이 500불 가까이 들겠다. 만약 와인과 칵테일 등 그 외 특별 요리를 주문하면 식사비는 더 올라갈 것이다. 뉴욕의 상류층이라면 가능한 일이나 내겐 너무나 먼 당신이다. 그 외 다니엘 셰프도 식사하라고 이메일을 보내오고 내가 사랑하는 곳이지만 역시 너무 멀다. 현실은 현실이니.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연말 잘 보내라고 소식을 보내오고. 하버드 대학, 뉴욕대, 링컨 센터,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누 갤러리, 메트 뮤지엄, 여행사 등 수많은 곳에서 이메일이 쏟아져. 난 이메일 부자야.

지난 월요일인가 굶주린 배를 채우려 집에서 가까운 한인마트에 가서 노르웨이산 고등어와 도미와 삼겹살과 상추와 양파와 아이다호 감자와 아주 작은 사과와 쌀과 라면과 김치를 구입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니 다시 먹을 게 없다. 먹고사는 일도 정말 쉽지 않아.

지난 화요일 내가 사랑하는 브룩필드 플레이스에 특별 공연을 보러 가서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일본 춤과 그 외 많은 공연을 봤던 곳. 허드슨강 전망을 볼 수 있어서 가끔 찾아가고 홀리데이 시즌 특별 공연을 열어서 방문했는데 난 도깨비를 만났어. 전날 아들과 함께 한인 마트에 걸어가면서 아들이 갑자기 한국 드라마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며칠 전 '도깨비' 드라마를 봤다고 했는데 드라마 제목이 드깨비인 줄 모르겠지만 공연을 열지 않아 실망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장소가 달라. 오늘 마지막 홀리데이 시즌 특별 공연을 여는데 난 집에서 메모를 하는 중. 맨해튼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할 텐데 복잡한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몸이 마비될 정도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오래전 알아버렸지만 나이 들수록 더 복잡해져 가고 나의 한계가 너무 많아.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휘트니 휴스턴은 저 세상으로 가 버렸지만 사회적 성공과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세계적인 가수는 저 세상으로 가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난 태어나지 않은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가는 길이 참 멀다.




12. 21 겨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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