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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수 Aug 28. 2020

미국 한인 이민의 역사





정의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재미 한인의 미국 이민사 개관.



개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세기 말 조선과 미국이 정치적·경제적 관련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1903년 

하와이

로 102명의 노동 이민과 미국 본토로 재이주가 6·25 전쟁 이후 결혼 이민과 입양아, 유학생의 이민, 1960~1970년대 이민 열풍으로 이어졌다. 2015년 현재 246만 명의 한인 이민자가 미국에 있다.


이민국의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미국 한인은 1901년 1월 9일 하와이섬에 온 퓨터 류이지만, 1894년부터 1901년 12월까지 131명이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통해 미국으로 왔다. 이들 중 86명은 홍콩 또는 상하이에서 출발해 도미한 인삼 장수들이다. 이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한 구인으로 1903~1905년에 7,000여 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하와이

로 건너갔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 동안 미군이 한반도에 군사적 개입의 일환으로 주둔하면서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이 늘어났다. 미군과 결혼한 여성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 초청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미국의 대중문화가 한국에 파고들면서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 한국의 신(新) 중산층을 중심으로 1960~1970년대 ‘이민 열풍’이 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국제적으로 한국에 대한 위상이 높아지자 미국 이민의 열풍이 사그라지며 오히려 역이민이 늘어나는 추세가 되었다.


오늘날 미국은 한국과 밀접한 외교적·경제적·문화적 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는 처음부터 영주 목적이 아니라 학업, 사업, 여행을 목적으로 떠났다가 현지에서 비자를 변경하여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는 한국인이 많다.



하와이 노동 이민과 미국 본토 재이주1903~1945년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까지 7,226명의 한인 이민자가


하와이

에 도착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20대 독신 남성이었다. 독신 남성 이민자들과 결혼하기 위해 1,000명의 한인 여성들이 사진 결혼의 형태로 1924년까지


하와이

로 건너가서 이민 가정을 형성하였다. 노동자와 사진 신부 외에 초기 미국으로의 한인 이주에서 중요한 집단은 유학생이었다. 1910년부터 1940년까지 총 891명의 유학생이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뿐만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재미 한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보다 높은 수입을 찾아 미국 본토의 농장과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재이주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재미 한인들은 캘리포니아 벼농사와 과수원 농장, 유타, 콜로라도, 와이오밍의 광산과 철도 공사장, 캘리포니아 북부 태평양 연안 지역의 어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5년에는 약 50여 명에 불과했던 재미 한인 수가 1941년에는 1,711명으로 증가했다.


노동자, 사진 신부, 유학생들로 구성된 미국의 한인 사회는 1945년 한국이 해방되기까지 

하와이

에 6,500명가량 그리고 미국 본토에 3,00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의 한인 사회는 미국 주류 사회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 이후 미국의 한인 사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1930년대에 들어서자 재미 이민 1세들은 고령화되고 재미 이민 2세들이 성인이 되면서 한인 사회의 세대교체가 본격화되었다. 재미 한인 이민 1세는 교회와 각종 단체를 중심으로 해외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재미 한인 이민 2세는 미국 문화에 동화되면서 친교 모임을 통해 화합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지역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8·15 해방과 6·25 전쟁1945~1965년



광복 후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주로 국제결혼 여성, 입양아, 유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의 여성이 미군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군의 배우자로 이민을 온 한인 여성은 10만 명에 달하였다. 1950년대에는 전체 한국인 이민자의 36%를 차지하고 1960년대에는 42%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이민자 집단이었다.


6·25 전쟁으로 많은 전쟁고아와 혼혈아들이 생겨나자 한국 정부는 1954년 해외 입양 사업을 시작했다. 1950~1960년대에는 고아들이 주로 입양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고아들보다 미혼모 아이들이 많이 입양되었다. 1954년 이후 2002년 말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15만 명으로 추산되며, 약 10만 명이 미국 가정에 입양되었다.


해방 후 1965년까지 6,000명 가량의 유학생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앉거나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 유학생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 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미국 이민법 개정과 신이민(1965~1992년)



19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으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급증하였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70년 초부터 본 궤도에 올라 연 3만 명가량의 한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 연 35,000명의 한인이 이민을 가서 한국은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에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되었다. 한인 이민은 1987년 35,849명으로 정점을 이루었다가 1998년 13,691명으로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한인 이민은 영어 능력 부족으로 미국 일반 노동 시장에서 직장을 찾기보다는 재미 한인 업소들에서 직업을 찾고 재미 한인 교회를 다니면서 동료 한인들과의 강한 유대를 맺지만 미국 주류 사회와 문화와는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한인들만의 생활로 말미암아 대도시, 특히 로스앤젤레스에 한인 타운이 생겨났으며, 재미 한인회 활동이 활발한 전개되었고, 재미 한인 언론과 단체들도 발전하였다.



1992년 이후 한인 사회1992년~현재



한국에서 중산층이었던 재미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언어적 장벽과 미국 교육과의 차이 탓에 미국의 주류 사회로 편입되지 못하자 자영업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특히 제한된 자본과 사업 기술 때문에 재미 한인들은 시카고의 사우스웨스트, 뉴욕의 브루클린뿐만 아니라 특히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 같은 저소득 흑인이 사는 지역에서 장사를 하였다. 흑인 주민들은 재미 한인 상인들을 흑인 지역에서 경제적인 기여는 하지 않고 자신들의 돈만을 갈취하는 부재 소유자로 보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인종 차별적 요인으로 1992년 4월 29일에서 5월 3일까지 6일 동안의 흑인 폭등이 발생하였다. 이 폭동으로 52명이 사망하고 2,238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재미 한인 소유의 업소 2,300개가 약탈당하였고, 재산 피해액이 4억 달러에 달하였다. 이 폭동은 재미 한인들에게 재산상의 피해뿐만 아니라 심리적 피해까지 끼쳤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 한인의 정치 의식과 정치 참여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치력 없이 경제력만으로는 언제든지 다시 큰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 판단과 소수 민족으로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소수 민족과 연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흑인 지역 사회에 대한 기부금을 확대하고 영향력 있는 흑인 단체 지도자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확장하였다. 1992년 4·29 폭동은 재미 한인 사회에 전환기를 맞이하게 했다.


1997년 말 한국의 외환 위기로 국내의 고용 불안정이 심화되고 일자리를 잃거나 고용에 불안감을 느낀 30~40대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한인 이민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였고 이 시기부터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조기 유학 붐으로 청소년들의 유학이 급증하였다.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는 ‘나홀로’ 유학에 대한 문제가 등장하면서 가족이 이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2015년 재외동포재단의 자료에 의하면 미주 한인 이민자 수는 246만 명으로 혼혈 가족과 합치면 그 수는 더욱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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