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4 목요일 흐림 / 다시 겨울
전날 동내 주택가에서 본 야생화가 너무 예뻐서 가슴 설레며 잔뜩 기대하고 다시 찾아갔다. 민들레꽃은 아파트 뜰에서 자주 보니 일조량과 관계가 깊단 것을 알았지만 연보랏빛 야생화 꽃은 어떤지 잘 몰랐다. 날씨도 약간 흐려 꽃 사진 찍기에 좋은 날이라고 더 기대를 했다. 그런데 날 실망시키는 야생화. 내가 도착했는데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일어나, 일어나, 내가 왔어."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쿨쿨 잠을 잤다.
이걸 어쩐담. 그래도 갔으니까 사진 몇 장 찍고 집에 돌아왔지만 아쉬운 마음에 두 번 더 찾아갔다. 역시나 전날처럼 예쁘게 피지 않아서 섭섭했다. 전날은 "봄이 왔어요."라고 외칠 만큼 화사한 날이라 공원에서 산책하는 주민들도 무척 많았다. 다시 뉴욕에 겨울이 찾아와 외출도 힘든데 세 번 찾아간 갸륵한 나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세 번째 방문 때는 약간 핀 꽃도 있었다. 뉴욕과 보스턴에서 가끔씩 보곤 했는데 야생화 이름도 잘 모른다.
기대가 높으면 실망하는 경우가 잦다. 그러니까 평소 기대를 하지 않는데 꽃이 날 실망시킬 줄이야.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라 가끔씩 지나 칠적 보곤 했는데 날씨와 꽤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 상황을 모르고 기대를 잔뜩 하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뉴욕으로 떠나오니 조용해졌다. 한국에서 지낼 적 우리 집 상황을 모르고 한 달 500만 원 보험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니 웃었다. 그 외도 참 많았다. 그래서 전화벨이 울리면 마음이 무거웠다. "이거 사 주세요. 일자리 줘요..." 등등.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부탁하면 난처했다. 내 상황이 좋다면 말하지 않아도 들어줄 텐데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한담. 겉으로 보인 것과 안은 다르기에 속사정은 잘 모른다. 저 사람은 행복하겠지라고 짐작해도 나름 고민이 많은 경우도 많다.
한 번은 대학 동창이 아주 두툼한 설문 조사를 해 달라고 집에 찾아왔다. 당시 두 자녀는 바이올린 특별 레슨을 받고 나 역시 첼로 레슨을 받을 무렵이라 바쁘니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모임에 가지 않았다. 얼굴 보자고 연락 오면 그럼 식사만 하고 떠나도 돼?라고 묻고 참석한 적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모임에 가면 종일 이야기하며 저녁 시간까지 함께 지낸 지인들도 있었다. 우리의 삶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도 참 많다.
함께 클래식 기타 반에서 활동한 친구였는데 모처럼 부탁했는데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깨알 같은 글씨 크기로 적혀 있는 설문지 양은 무척 많았다. 친구는 금방 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내겐 잠깐이 아니라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친구의 시간과 내 시간 개념이 달랐다. 할 일 없어서 심심하면 재밌게 할 수도 있을 텐데 내 사정은 달랐다. 그래서 거절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어려운 형편이라서 내게 도와 달라고 했을 텐데 그때는 시간은 없었지만 약간의 돈을 봉투에 담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와달라고 찾아온 마음은 어떠했을까. 영화배우처럼 예쁜 미모라서 카톨릭 의대생 미팅도 소개했는데 인연이 되지 않았다.
함께 동아리반에서 활동했던 친구들은 무얼 하고 지낼까. 내게 레슨 해주던 선배 안부도 무척 그립다. 동아리 내 커플인지 몰랐다. 내가 레슨 받을 때 자주 나타난 미모의 선배랑 나중 결혼해서 놀랐다. 그때도 지금도 난 눈치가 없다. 클래식 기타곡도 언제 들어도 좋다. 음악은 천상의 선물.
야생화 사진 찍고 나서 평소대로 호수에 산책하러 갔다. 겨울처럼 추운데 호수는 다 녹아 있었다. 산책하면 기분이 좋은데 날씨가 추워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기운이 없어서 늦게 기록
3월 6일 아침
뉴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