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 방황과 좌절과 아픔

by 김지수


대학 시절 꿈꾸던 세상을 먼 훗날 만나게 될 거라 한 번도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나의 20대 역시 방황을 했고 좌절과 상처와 아픔의 연속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와 외로움으로 힘든 것은 비단 20대 만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30대, 40대, 50대 아니 60대라도 불안하고 외로움으로 하루하루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많을지 모른다. 나의 흔들거리는 방황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 모른단 생각으로 나의 20대 방황에 대해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정말 많이 아파했고 많은 방황을 했고 답답한 세상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노력했다. 20대 달빛 같은 나날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황금빛 청춘은 아프기만 했다. 평범한 집안에 태어나서 부모를 원망한 적도 없고 언제나 난 내 삶을 받아들이고 내가 원하는 세상을 꿈꾸며 내가 원하는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평생 많은 노력을 하며 나만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비록 현실은 날 한 번도 편하게 두지 않지만.

평범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서울대에 진학할 정도로 우수하지 않아 지방 국립대 사범대에 진학한 나로서는 세상이 너무 답답했고 그때 세상으로 가는 통로는 사랑하는 책이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서 읽으며 낯선 세상을 조금씩 열어가고 꿈을 꾸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소설을 읽으며 어찌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을 소설로 완성했을까 하면서 런던에 대해 호기심이 커져 갔고 런던에 여행을 간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후였다. 하지만 단 며칠 여행하는 것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런던을 전부 느낄 수는 없었다. 파리에 여행 갔을 적에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등장하는 라비크 의사를 잠시 생각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삼중당 문고판을 매달 몇 권 씩 구입해 읽으니 나중 수 백 권의 문고판을 다 읽게 되었지만 물론 지금 나의 기억은 아스라이 멀어져 갔을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바이올린을 처음으로 보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했으나 공무원이던 아버지에게 입도 벙긋 열지 못할 상황이었고 그런 나의 꿈은 먼 훗날 교사로 발령이 나서 첫 급여를 받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내 꿈이 세월이 흐른 동안 변했다면 난 결코 바이올린 레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시절 지방대에 진학하니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었다. 서울로 진학하지 않았다고 세상이 무너진 것은 아니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찾았다. 여러 개의 동아리방에서 활동하고 싶어서 학생회관을 돌아다니며 각각 다른 여러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연극반, 사진반, 클래식 기타반, 관현악반, 영어 타임지 반 등.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반은 모두 활동하기 어려워 한꺼번에 많은 동아리방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들어서 고민하다 고등학교 친구 오빠가 활동 중인 클래식 기타 반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에서 활동한 사람은 잘 알겠지만 클래식 기타 반 활동은 그냥 선후배 만나서 놀고 시간만 보내는 곳은 아니었다. 매주 레슨을 받고 매년 봄과 가을 정기 연주회를 준비하고 나중 선배가 되면 후배 레슨을 해주고 하니 정말 아주 바쁠 수밖에 없었다. 활동하지 않은 사람은 왜 그리 바빠하고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해 본 자는 잘 안다. 악보를 보고 아무리 연습해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있고 선배 얼굴 볼 거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그랬다. 암튼 동아리방 활동은 내 대학 시절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에 속했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정기 수련회를 가고 가서 연습하고 밥하고 함께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나하나 경험이 다 배움으로 왔을 거라 짐작한다.

또한 대학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고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학교에 가서 수업 듣고 빈 시간에 동아리방에 가서 연습하고 친구들 만나고 수업 끝나면 아르바이트하러 가고 등. 하루 스케줄은 언제나 꽉 찼다. 굳이 매일 스케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다양한 친구들을 카페에서 만나 음악도 듣고 이야기도 했고 남자 친구도 만나니 더 바빴다. 남자 친구는 내가 너무 바쁘니 집에 전화해도 없는 경우가 더 많았고 정기 연주회를 준비할 시는 밤늦게 거의 자정 무렵에 도착하니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당시 휴대폰 문화도 없었고 오로지 집 전화만 있어서.

당시 친구들 가운데 나처럼 바쁜 사람은 드물었다. 남자 친구를 만난 것과 아닌 차이도 크고 동아리방 활동도 한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고 아르바이트를 한 것과 아닌 것과 역시 차이가 컸다. 또한 책을 사랑하는 난 언제나 빈 시간이 되면 틈틈이 책을 읽었다. 물론 가끔 기분이 울적하면 혼자 라이브 음악 감상실에 가서 음악을 듣기도 했다. 테이블에 혼자 커피 한 잔 주문하고 마시면서. 당시 친구들은 그런 나의 성향을 잘 몰랐다. 지방에서 지내니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를 볼 수 없었지만 혼자서 연극을 보러 가고 혼자 공연과 전시회를 보러 갔다. 바쁜 스케줄에 친구랑 함께 가면 스케줄 만들기 더 어려우니 혼자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 시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그 후 발령이 나서 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도시와 더 멀리 떨어진 곳이라 혼자 자취생활을 했다. 정말 고독한 시간이었다. 교사들끼리 모임도 많았지만 난 늘 혼자서 지냈다. 이유가 있었다. 바이올린 레슨도 받고 일본어 등 어학 공부도 하고 싶어서. 어학과 악기는 나의 오랜 꿈이라 혼자서 공부를 했다. 교직에 종사하니 수업 준비로 너무 바빴고 당시 고 2. 3 수학이라 더 바빴고 문과 이과 수업 모두를 준비해야 하니 더 바빴고 거기에 보충 수업을 하라고 하니 더욱 바빴다. 교사 생활은 날 흔들어버렸다. 학교에서는 비단 수업만 하는 게 아니다. 처리해야 할 사무도 있고 담임도 맡고 얼마나 바쁜지. 아... 숨이 막힐 듯 바빴다. 그래도 전부 해내야만 했고 해냈다.

대학 시절부터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아, 결혼이 뭔지 모르고 결혼을 했다. 죽음 같았다. 결혼을 하니 자취생활을 접고 집에서 통근을 했다. 오래오래 만난 남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했고 약혼 무렵 소형차를 샀고 계약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내가 지불했으나 여자이니 운전하면 안 된다고 하는 남자와 함께 살았고 그는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새벽에 귀가하고 새벽에 출근을 하고. 나 역시 하루 4-5시간 정도 걸린 곳에 통근을 했다. 차를 이용했더라면 아주 짧은 시간에 직장에 도착했을 거지만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으니.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오래 걸어야 했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면 다시 버스를 기다리고 학교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다시 학교까지 30분 정도 걸었다. 당시 그런 환경에서 통근하고 지낸 교사는 거의 없었다. 교사 역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지낸 경우도 있었다. 난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했다. 학교에 가면 수업도 많고 사무 일도 많았고 집에 밤늦게 돌아오면 혼자서 식사를 하고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았다. 결혼 후 매주 토요일 시댁에 방문했다. 신혼 초 결혼생활은 죽음에 가까웠고 자살을 할까 말까 백 번도 더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다 적응이 되어갔다. 침묵으로 이어지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지옥 같은 생활에 차츰 적응을 했고 임신이 되고 그래도 매일 수 시간 버스로 통근을 했다. 첫아이 분만 후 아이 아빠는 과정을 마치고 군 훈련을 받고 전방에서 근무했다. 함께 사는 동안 이사도 자주 했다. 이사는 항상 나 혼자 몫이었다. 혼자서 짐을 싸고 풀고.

전방에서 지내기 위해 학교에 휴직서를 제출했고 거주할 집이 없다고 하니 집을 구하러 전방에 갔다. 그때는 혼자서 운전을 하고 찾아갔다. 수 시간을 달리고 낯선 도로에서 교통사고도 났고 서울로 진입하는 버스가 슬쩍 스쳐갔지만 소형차는 쭈글쭈글해졌고 다행히 몸은 안 다쳤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고 그런 차를 몰고 전방에 가서 살 집을 구했다. 함께 집을 구하면 좋겠으나 천만에. 혼자서 집을 구하러 움직이고 전방은 아파트 전셋값이 정말 비쌌고 더러웠고 살만한 집을 구하기 아주 힘들었다.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다 그 후 아이 아빠는 군대로 들어가 버리고 난 혼자서 운전을 하고 서울 친척 집을 찾아갔다. 물론 서울 지리를 난 몰랐다. 낯선 서울에서 운전을 하고 전방까지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내다 시장 근처에 방 하나 구했다. 박완서 소설에 나 등장할 동굴 같은 집도 많고 마음을 비우고 잠만 잘 수 있는 환경이라면 만족했다

집으로 내려와 방 하나에 들어갈 짐을 혼자서 쌌다. 어린 딸을 키우면서. 30평 아파트에 짐을 그대로 두고 전방에는 최소의 짐을 갖고 출발했다. 얼마 후 군에서 참모 부인들이 찾아와 우리 사는 형편을 보고 기절을 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산 사람이 있어요 하면서. 살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방 하나에 들어갈 수 없으니 집에 그대로 두고 말 그대로 인간이 살 최소의 짐을 갖고 전방에 갔다. 그 후 군 아파트가 비어 있다고 이사를 하라고 해서 다시 혼자서 짐을 쌌다. 전방에 있는 동안 바이올린 레슨이 비싸니 대신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대학 시절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다 준 윌슨 테니스 라켓으로 레슨을 받고 유산을 하자 그 후 레슨을 중지했고 그 후 둘째 아이 임신을 했고 다시 대학시절을 보낸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무렵 고민하다 사직서를 제출했고 집에서 두 자녀를 길렀다. 두 자녀가 성장하면 다시 공부를 한다는 조건으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두 자녀 어린 시절 한시도 엄마에게는 자유로운 시간이 없었다. 하루 24시간을 함께 보냈다.

20대 대학 시절도 무척 바쁘게 보냈지만 당시 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을 했고 될 수 있으면 많은 책을 읽고 공연과 전시회를 보고 등 그런 생활을 꿈꿨고 아무도 그런 나의 말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의 꿈은 먼 훗날 세월이 흘러 부화했다. 대학 시절 꿈꾸던 세상을 수 십 년이 지나 만났고 그런다고 내가 원하는 세상이 그냥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것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하나씩 가능해졌다. 단 하나도 그저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모두 내가 노력해야 가능했다. 어느 날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받는 인터뷰 질문 가운데 당신에게 하루 100불이 주어지면 무얼 하겠냐고 물었는데 한국 학생들은 항상 공부만 하느라 그런 질문이 무척 어려웠다고. 세상에 내게는 그처럼 쉬운 문제는 없었을 텐데. 대학 시절부터 난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만약 내게 1000원이 있다면 무얼 할 수 있고 10000원이 있으면 무얼 할까 등. 이런 나의 삶의 방식은 어쩌면 내가 읽던 수많은 책에서 왔을 거라 짐작을 한다. 당시 20대 문화도 있었고 난 늘 세상이 원하는 틀에 맞춰 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삶을 지향했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았다. 그런 난 늘 미운 오리 새끼였는지 모른다.

삶은 현재 진행형이고 언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오늘 나의 최선을 다하고 어제는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은 내일로 이어질 것이다. 20대 내가 했던 방황과 좌절과 아픔은 내 삶의 거름이 되었고 단 한 번도 편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지 않았다. 대학시절, 교사 시절과 결혼 시절 항상 난 바쁘게만 지냈고 그런 날 이해한 자는 소수였으나 그런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뉴요커의 삶과 비슷하다. 뉴요커의 삶이 결코 화려한 것만이 아니다. 소수 상류층은 파티 문화에 젖어 지낼 것이나 대다수 이민자 삶은 정말 열심히 일하고 지낼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곳에서 몰려오는 이민자 도시이니. 내가 젊을 적 그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난 뉴욕 생활에 적응하고 살 수 없었는지 모른다. 끝도 끝도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날 감싸지만 그래도 참고 견디고 버티고 산다. 어딘가에서 필 장미꽃을 기다리며.


2018. 1. 5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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