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밤이야.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부엌 싱크대 파이프는 지난주 고장이 났으나 슈퍼가 오늘 밤 찾아왔지만 바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다려 달라고 하고 오래전 롱아일랜드 제리코 아파트에 살 때도 기억이 난다. 화장실 바닥 타일이 비스킷처럼 바삭바삭 부서졌는데 관리실에 연락해 수리해 달라고 하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연락이 와서 내게 아파트를 비워 달라고 하는데 미국에 우리 가족 재워줄 사람도 없는데 갈 곳이 있어야지. 그때 딸은 런던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딸은 엄마와 동생에게 보스턴 여행 가라고 이미 호텔도 예약을 해 버려서 며칠 보스턴에 가서 지냈고 메가버스를 타고 갔다. 그때 하버드 대학에 방문했지만 세월이 흘러 우리 가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 될 줄 몰랐다. 지금은 딸이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으니 보스턴이 친정처럼 가까워져 간다. 한국 아파트가 얼마나 좋은지. 맨해튼 부촌 아파트야 물론 좋겠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는 소설 배경이야. 영락없이 난 소설의 주인공이 될 모양이다.
슬픈 일이 그뿐 만이 아니야. 어제 종일 청소를 하고 밤늦게 밀린 사진 작업을 했는데 작년 11월 사진 작업을 하노라니 보스턴 여행 사진이 보이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아는 이 없는 낯선 도시에 와서 사는 게 바로 아픔 아니겠어. 단 한 가지도 쉽고 편안한 게 있어야지. 텅텅 빈 방에 채울 가구를 조립하는데 무려 1달이 걸렸고 부촌 롱아일랜드 딕스 힐과 제리코에서 부잣집 자녀들과 함께 공부한 두 자녀. 엄마도 공부를 하니 지옥 열차를 탄 것이라 두 자녀 공부에 신경을 쓸 수 없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힘으로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갔던 두 자녀 일도 생각이 나 눈물이 나왔다. 요즘 기말시험 시즌이라 일하고 공부하니 무척 바쁜 딸은 5월 말 보스턴에 여행 오라고 연락이 와서 버스 스케줄을 알아보고 왕복 티켓을 예약했는데 조금 전 다시 확인하니 버스값이 반액이 되어버렸네. 너무 슬퍼. 오페라 한 편 볼 돈이 하늘로 붕붕 날아가 버렸어. 메트 오페라도 보고 싶은데. 사랑하는 Orchid Show도 해마다 보곤 했는데 올해 안 보고 시간이 흘렀다. 난 축제 입장료와 오페라 러시 티켓값이 비슷하니 차라리 오페라 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고 싶은 난 축제도 못 봤는데 어이없이 버스표가 말썽을 피우니 속이 상했다. 우리 집 사정이 더 좋았다면 두 자녀는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한국에서는 주위에서 부러워하는 가정에서 자라다 뉴욕에 와서 가장 밑바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니 극과 극의 삶을 체험한 두 자녀. 천국과 지옥 열차를 어린 시절 탔으니 다 운명인지 모르겠다.
어제 종일 청소를 하다 문득 모마 PS1에서 지난 일요일 열린 특별 이벤트도 깜박 잊고 안 간 것도 생각이 나고 요즘 정신이 없나. 한 달 전부터 꼭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놓쳐버려 너무 아쉽기만 하다. 줄리아드 학교 공연 티켓도 몇 장 나오고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도 보고 아름다운 몸매에 나도 잠시 황홀해졌는데 남자들은 오죽할까. Pottery Barn에서 보낸 잡지 인테리어는 멋지나 다 그림이니 슬프고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에서 딸에게 보낸 잡지는 안 보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지. 백화점 구경한 지도 정말 오래되어 간다. 백화점이 우주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내게는 멀리 있을까. 흩어진 쓰레기 속에 카네기 홀 프로그램도 보이고 안네 소피 무터, 요나스 카우프만, 다닐 트뤼포 노프 얼굴 사진도 보이고 저 멀리 있던 카네기 홀은 세월이 흐르니 점점 가까이 온다. 작년 11월에도 많은 공연을 봤고 음악 잡지에서 보던 길 샤함 바이올리니스트 공연도 보고 아들이 매일매일 연주하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해서 좋았다. 자주 듣다 보니 템포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하는데 그날 길 샤함은 약간 빠르게 연주를 했다.
작년 11월 많은 곳에 방문했다. 카네기 홀에서 공연 보고,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장 가서 피카소, 반 고흐, 모네, 샤갈, 앤디 워홀 등 그림값이 천문학적인 숫자의 작품도 보고 내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피카소와 고흐와 모네와 샤갈이 내 친구라면 내게 그림을 줬을까. 작년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갤러리에 가니 당시 예술가들이 서로서로 작품을 교환했다고 하는 말도 듣고 갤러리 안에 아주 많은 작가의 작품이 벽에 붙여져 놀랐다. 줄리아드 학교, 메네스 음대 등에서 방문해 많은 공연을 봤는데 갈수록 시간에 허덕여 점점 줄리아드 학교에 가지 않고 지낸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어린 천재 소녀 피아노 연주도 봤는데 줄리아드 예비 음악학교 학생이었는데 작곡도 하고 연주도 쇼팽처럼 잘 하니 훗날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거라 짐작한다. 늦가을 햇살 좋은 날 사랑하는 센트럴파크에 가서 산책도 했다. 호수에서 보트를 타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담고 노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공원을 걸으니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 11월의 아름다운 햇살이 황금빛 낙엽에 비추면 하프시코드 음색이 떠오르게 한다. 런던에서 온 피아니스트가 청중이 "브라보 브라보" 외치자 정말 기분이 좋은 표정을 짓고 다시 앙코르곡을 연주하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사실인 듯. 뉴욕대 서점에 가서 이벤트도 봤고 붉은색 옷을 입은 피카소도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봤는데 내게 그림 몇 점 주면 좋을 텐데 하늘나라에서 사니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슬프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 공연을 보러 카네기 홀에 가니 그 피아니스트와 푸틴이 친하다고 시위를 하니 하나씩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푸틴은 정말 돈이 많다고 하고 이혼을 했다고 별걸 다 알아가게 된다.
작년 11월 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딸이 사는 보스턴에 여행 간 것. 두 자녀 고등학교 시절 하버드 대학에 가서 언제 우리가 이곳에 다시 오겠니? 했는데 먼 훗날 딸이 공부하고 일하니 엄마가 자녀를 과소평가했다고 핀잔을 받았다. 딸이 준비한 메뉴로 식사를 하며 에드 시런의 음악을 들었는데 정말 좋아 그 후로 가끔 듣곤 한다. 보스턴에 가서 전시회를 봤는데 비 오는 날 피아노를 치니 무슨 슬픈 일이 있길래 그렇게 고개 숙이고 피아노를 연주했을까. 미치도록 사랑하는 연인이 멀리 떠났을까. 하버드 대학 앞에 있는 서점 북 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고 뉴욕에 돌아와 링컨 스퀘어에서 열렸던 Winter's Eve 축제에 가서 뉴욕 유명한 셰프가 만든 음식을 먹었는데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라 샘플 음식 한 개만 주문했는데 직원은 정말 한 개만 주문할 거냐 물었는데 그 갈비 맛이 얼마나 좋던지. 후회가 되었다. 인기 많은 맛 집은 줄이 길어서 오래 기다려야 하니 포기했다. 콜럼버스 서클 타임 워너 빌딩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니 평소 갈 수도 없는데 더 많이 먹을 걸 그랬어. 11월 말 카네기 홀에서 김봄소리 바이올린 공연도 보고 그것도 무료니 더 좋았지. 아, 그리운 보스턴 항구.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숨이 막히지. 햇살이 숨을 죽이면 바다 빛은 변하고 찰나를 잡아야 그 아름다움을 느낀다. 물론 그 찰나에 사진을 찍어야 바다 빛이 예쁜 바다가 담긴다.
화요일 집에서 사진 정리하고 아파트 지하에 가서 세탁을 했으니 싱크대 수선은 안 했어도 감사하게 하루를 마쳐야 하나. 점점 밤은 깊어만 가고 이웃집 자목련 꽃도 여러 차례 봤다. 작업하다 눈이 아프면 목련 꽃을 바라보고 금세 질 거 같아 걱정이 된다. 센트럴파크에 벚꽃이 피었을까. 아파트 뜰에 노란 민들레 꽃과 하얀 제비꽃이 방긋방긋 웃고 있다.
2018. 4월 17일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