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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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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의별짓 Feb 13. 2021

가족의 인정

인정받고 싶은 맘에 시작한 과시가 때론 버거울 때.

나에겐 3살 터울의 오빠가 있다. 50년대생 부모들이 그렇듯 우리 집도 아들 중심 생활이었고, 그 덕에 나는 자유와 방임, 그 사이 어딘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부모님에게 자주 했던 말이 "그럼 나는?"이었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제공되는 사랑이, 나는 요구하고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어린 시절, "그럼 나는?"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집안에서의 나의 모든 행동과 요구 조건의 기준은 오빠였다. 


스무 살이 지나, 오빠가 유학을 가면서 집안의 모든 생활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들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 식은 건 아니었지만(오히려 더 애틋해졌지만), 적어도 직접 내 눈으로는 보는 건 아니었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전쟁 끝에 적군이 물러나, 오롯이 내 땅을 차지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집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과시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


처음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오빠가 한국에 없어서 못하는, '부모님 심부름 하기' 같은 나만 할 수 작은 일들을 소위 생색내면서부터 시작됐다.  


"내가 했다고 오빠한테 말해"


오빠하고 서로 연락할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녔기에, 전달자인 엄마를 통해 나의 착한 행위가 오빠의 귀에 들어가기 바랐다. 그렇게 하나둘씩 생색내는 일들이 늘어났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역할은 점점 커져갔다. 처음 시작은 "그토록 열심히 뒷바리지 했던 아들보다 지금 내가 더 잘하고 있다"는 것을 부모님과 오빠한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때론 필요 이상의 나의 능력과 재력을 과시했고, 스스로에게 만족했다. 한 서른 중반까지는 이런 과정이 나름 재미도 있었고, 뭔가 통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정받고 싶어 시작했던 과시가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뭔가 당연한 듯한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특히 오빠가 미국에 정착하면서 '당장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점차 집안의 모든 일들에서 오빠는 배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령의 노부모를 옆에서 돌보지 못한 오빠의 미안함이 나에 대한 고마움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나의 모든 가족을 위한 행위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사실 이런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세월 앞에 나름 철도 들었기에, 과거 인정 욕에 의한 과시보다는 현재는 인간으로서 도리가 더 앞선다. 오빠 역시 고령의 노부모를 옆에서 돌보지 못한 미안함을 나에 대한 고마움으로 표출하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지금까지 해왔으니까'. '오빠는 어차피 미국에 있으니까'라는 식의 이 당연한 분위기가 가끔씩 버거워진다. 그 버거움에 한 번씩 모른 척 넘겨버리면, 모두에게 상처만 남는다. 이럴 때면, 가끔씩 내게 연락해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편해 보인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게 동등한 입장에서 대우받고 싶은 나의 인정 욕에 의한 과시에서 의해 생긴 일이란 걸 알고 있다. 너무 일찍부터 나서서 해결하다 보니, 정작 챙겨할 타이밍에 오히려 버거워졌다.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 이제와 포기하자니,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무너지는 것 같아 싫고, 그렇다고 끝까지 짊어지고 가자니 순간순간 버거워진다. 꾹 참고 가자니, 아직 갈길이 너무 멀다. 그래서 한 번씩 폭발하는 나의 버거움에 가족들은 놀랜다. 


인정과 과시 그 언저리에서.. 헤매는 지금. 더 이상의 인정과 과시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만든 지난날의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고 보듬어 주는 게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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