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국

A팀장 이야기

by 나혜

인생에는 몇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다.

누가 회사생활에서의 터닝포인트를 물어보면 A팀장과 일하게 된 때라고 0.1초 안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11년 7개월 동안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했다.

어느 날 A팀장이 field couching을 위해 내가 담당하던 지역에 왔다. Field couching은 팀원이 담당하는 지역에 가서 함께 고객을 방문하고, 팀원의 영업 방식과 계획에 대해 조언을 하는 업무다.


"아우 힘들다. 어제 과음했는데 점심으로 뭐 괜찮은 거 있어?"

"음... 해장국 어떠세요? 친구랑 가던 곳이 있는데 국물 괜찮아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까 봐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유명한 해장국 집이었다. 어느 골목에나 있을 법한 조립식 건물에 허름한 간판이 걸려있는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식당이었다.

별 기대 없이 국물을 한 숟갈 떠먹은 A팀장은 신세계를 맛본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두배로 커졌다. 소머리를 진하게 고아내어 콩나물 한 움큼 넣고 매콤한 다대기를 풀었으니 시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신선한 간 마늘까지 반 숟가락 넣으면 이건 숙취인에게는 음식이 아니라 약이었다.


컨디션이 바닥을 찍을 때 인생 해장국을 접한 A팀장은 내가 담당하던 지역에 올 때마다 이 식당을 찾았다. 뜨거운 여름에 더 뜨거운 해장국을 먹은 건 당연했고, 팀원들에게 해장국 예찬을 얼마나 했던지 팀원들이 그 맛을 궁금해했다. 결국 1박 2일로 Team building 할 때 나는 팀원들을 위해서 이 국을 포장해 가기도 했다. (당연히 식당에서 뚝배기에 끓여 나오는 맛과 차이가 꽤 있어서 아쉬웠다.)


여하튼 고맙게도, A팀장은 해장국에 보였던 뜨거운 지지를 나에게도 보내주었다.




입사, 결혼, 출산이라는 인생의 기념비적인 일들을 3년 안에 해치운(!) 나에게 아내, 엄마, 주부, 며느리라는 역할이 생겼다. 난이도가 급상승한 새로운 삶이 버거웠고 늘 시간에 쫓기며 허덕였다.

회사원으로서의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리를 눈앞에 두고도 어설픈 직원이었고, 회사 내 근무평정에서는 늘 Medium level에 머물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아등바등 하루를 버티던 나는, 조직개편에 따라 다른 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 만난 A팀장은 나의 성실하고 진실된 면을 높게 평가했고 전략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조언해 주고 같이 뛰었다. 지시와 질책보다는 2인3각으로 같이 뛰며 솔선수범하여 장애물을 제거하고 로드맵을 제시하는 이상적인 팀장이었다.


또한 나는 A팀장을 보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기적적인 일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가 담당했던 지역은 팀이 맡고 있는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나는 늘 전화로 팀 회의에 참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은 모두에게 부담이었는데, A팀장은 갓 대리를 단 나에게 회사 내에서 성장할 수 있는 업무를 주려고 노력했다. A팀장의 믿음이 고마웠고 나는 그에 부응하려 최선을 다했다. 평행선을 그리던 실적은 믿음, 칭찬, 격려를 받아 대나무처럼 쑥쑥 자랐다.


그해와 이듬해 2년 연속으로 나는 같은 대리 직급이었던 직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적을 기록했고 부상으로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A팀장은 작은 지역의 세일즈를 담당하며 조용히 지내던 나를, 회사 안에서 주목받는 샛별로 만들어 주었다. 일 년 후 팀장은 다른 부서로 이동했고 그 팀에서도 여러 샛별들을 만들어 냈다.

(이쯤 되면 A팀장은 리더십 책을 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가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전업맘이어서 내가 경험한 믿음, 격려, 칭찬의 가치를 전수해 줄 후배는 없다. 그 대신 나의 아이들에게 이를 그대로 전해주려 노력한다. 물론 아이를 키우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지만 굳건한 기준이 있으니 흔들리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무더운 여름날에 가끔씩 그때의 해장국이 생각나면서 A팀장의 은혜도 같이 떠오른다.



P.S. A팀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오래된 동네 골목 어귀에 있던 해장국집은 어느 순간 번호표 기계를 들이더니 이제는 전국에 체인점을 두고 있다. 다소 어폐가 있지만 이 해장국도 A팀장의 샛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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