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 까미노 제9일 차(Logrono to Rajera, 29.6 km; Sept. 28, 2017)
로그로뇨 '라우렐 거리'에서의 밤은 '승리' 그 자체였다. 8일간의 사투 끝에 '거위 게임'의 다리를 건넌 순례자는, 라 리오하의 붉은 와인으로 그 승리를 마음껏 자축했다.
하지만 까미노의 아침은 달콤한 숙취 따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9일 차의 아침, 알람 소리와 함께 찾아온 것은 묵직한 두통과 29.6km라는, 어제보다 더 길고 잔인하도록 정확한 숫자였다. '승자의 여유'는 간밤의 와인잔과 함께 사라지고, 욱신거리는 발바닥과 무거운 배낭을 멘 '순례자의 숙명'만이 남았다.
번잡한 로그로뇨 도심을 벗어나 길을 제대로 들오서는 것이 쉽지가 않다. 따라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까미노 화살표를 잘 찾아 따라가든지 아니면 앞에 가는 순례자들의 뒤를 잘 쫓아가야 한다.
로그로뇨 도심을 살짝 벗어나면 이제껏 걸어온 길 중 가장 편안한 공원 산책로(Parque de la Grajera)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그 평화는 잠시뿐. 공원을 벗어나자마자 라 리오하의 진짜 민낯,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의 바다가 다시 시작된다.
어제는 '와인의 땅'이라는 설렘으로 이 포도밭이 낭만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29.6km라는 목표 앞에서는, 그저 지루하고 끝이 없는 노동의 현장일 뿐이었다. 길은 중간 기착지인 나바레테(Navarrete)를 지났다. 도자기로 유명한 이 작은 마을에서 잠시 숨을 돌렸지만, 가야 할 길은 아직 절반도 더 남아 있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발바닥의 통증은 다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이 길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20km를 넘어서자, 몸은 기계적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지만 정신은 점차 희미해졌다. 27.7km를 걸었던 8일 차와는 또 달랐다. 29.6km라는 거리는,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마지막 한 걸음이 더 필요한 영역이었다.
오후 늦게, 거의 탈진 상태로 오늘의 목적지 나헤라(Nájera)에 들어섰다. 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절벽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로그로뇨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고대 도시였다.
나는 그저 '오늘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으로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그런데 이 작은 마을이, 한때 피레네산맥 이쪽 스페인 북부를 호령했던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나헤라의 심장은 단연 '산타 마리아 라 레알(Santa María la Real)' 수도원이었다. 그리고 그 수도원에 얽힌 전설은, 29.6km의 피로를 잊게 할 만큼 신비로웠다.
전설에 따르면, 1044년경 이 지역의 왕이었던 돈 가르시아 3세(García of Nájera)가 매사냥을 하고 있었다. 왕의 매가 붉은 절벽의 한 동굴 속으로 꿩을 쫓아 사라졌고, 왕이 그 뒤를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그 어두운 동굴 안에서 왕이 발견한 것은, 꿩을 발치에 두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 매와, 그들을 환히 비추는 성모 마리아 상(像)이었다. 성모상 앞에는 램프가 기적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 옆에는 종과 백합 꽃병이 놓여 있었다.
이 신비로운 체험에 감명받은 왕은, 훗날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 이 모든 것이 성모의 가호라 믿었다. 그리고 1052년, 그는 자신이 기적을 목격했던 바로 그 동굴 위에 거대한 수도원을 짓도록 명했다.
나는 이끌리듯 그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했다. 수도원의 제단 뒤편은, 벽돌이 아닌 거대한 붉은 자연 암석, 바로 '그 동굴' 자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사냥꾼 왕이 매를 쫓아 들어왔던 그 신성한 동굴 안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도원의 한쪽에는 '왕들의 판테온(Pantéon de los Reyes)', 즉 이 도시를 수도로 삼았던 나바라-나헤라 왕국 수십 명의 왕과 왕비들이 잠든 석관들이 장엄하게 도열해 있었다.
나는 와인 숙취에 절어 29.6km를 겨우 걸어온 초라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수백 년 전 이 땅을 호령했던 왕들의 무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로그로뇨가 '순례자의 보상'이었다면, 이곳 나헤라는 '왕들의 역사' 그 자체였다. 까미노는 나에게 이틀 연속으로 극과 극의 체험을 안겨주었다. 29.6km의 고통은, 이 장엄한 '왕의 동굴'로 들어오기 위한 입장권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