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11)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11. 텅 빈 들판, 텅 빈 도시, 그리고 살아있는 닭

: 까미노 제10일 차(Rajera to Santo Domingo de la Calzeda, 21.0 km; Sept. 30, 2017)


Sept. 29, 2017: 발 뒤축에 물집이 심하게 잡혀 하루 숙소에서 쉬면서 치료함


1) 왕들의 무덤을 나서다


그젯밤, 나헤라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수도원에서 나는 잠든 왕들의 석관 사이에 서 있었다. 왕이 매를 쫓아 발견했다는 신비로운 동굴 제단은, 이 길이 단순한 흙길이 아니라 역사의 심장부임을 깨닫게 했다. 그 장엄함에 압도된 하룻밤이 지나고, 10일 차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의 목적지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약 21km. 30km의 고행을 막 치른 나에게 21km는 마치 가벼운 산책처럼 느껴졌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면 훌륭하지.' 라 리오하의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나는 왕들의 도시를 뒤로하고 다시 길 위에 섰다.


"To Santiago de Compostella" - 산티아고, 신성한 별들의 도시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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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든 것을 내어준, 텅 빈 들판


왕들의 도시를 벗어나 작은 마을 아소프라(Azofra)를 지나는 길은, 9일 차와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는 붉게 타오르던 포도밭이었다면, 오늘은 모든 것을 내어준 '텅 빈 들판'이 나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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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추수는 모두 끝이 났다. 포도송이가 사라진 포도나무는 잎사귀마저 바싹 마른 채 앙상한 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밀밭 역시 베어낸 밑동, 황금빛 그루터기만이 붉은 흙 위에서 촘촘히 빛났다. 이 가을의 '비워냄'은 쓸쓸하기보다 오히려 숙연했다. 모든 것을 내어준 땅의 고요한 휴식처럼, 그 텅 빈 풍경 속에서 흙길을 밟는 내 발소리와 스틱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20170930_103516.jpg 300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한 거점에서 새벽에 동시에 출발하지만 걷다 보면 어느샌가 서로 멀찌감치 떨어쟈 걷고 있게 된다.



3) '유령 도시' 시류에냐, 2008년의 흉터


그렇게 텅 빈 들판을 15km 넘게 걸었을까. 중세의 시간에 완전히 익숙해져 몸과 마음이 지쳐갈 무렵, 오늘의 목적지인 산토 도밍고를 불과 6km 앞두고 길은 아무런 예고 없이 나를 21세기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쳤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방금까지 흙과 자갈을 밟던 내 발이, 갑자기 잘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 위에 서 있었다. 길 양옆으로는 방금 지은 듯한 수백 채의 현대식 아파트와 타운하우스가 즐비했다. 하지만 그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여긴 뭐지? 길을 잘못 들었나?'


텅 빈 들판 위에 세워진 유령도시, Ciruena



그곳은 시류에냐(Cirueña), 스페인의 부동산 광풍이 낳은 '유령 도시'였다. 2000년대 초, 개발업자들은 이곳에 골프 코스와 수영장까지 갖춘 거대한 주거 단지를 꿈꿨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치자,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노란 화살표는 나를 '아이 없는 놀이터'와 '학생 없는 학교', 잡초가 자란 골프장 사이로 이끌었다. 마치 중성자탄이 떨어져 건물은 그대로인데 사람만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순례길이, 불과 10년도 안 된 이 거대한 현대의 폐허 한복판을 정통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기괴한 아이러니 속에서, 과거와 현재, 성(聖)과 속(俗)을 가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이어지는 '길'의 무심함에 복잡한 감정이 차올랐다.



4) 순례길의 아버지를 만나다


기묘한 유령 도시를 빠져나와 다시 흙길을 걷다 보니,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곧, 이 도시의 이름이 왜 위대한지 깨달았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길 위의 성인 도밍고'라는 뜻이다. 그는 11세기, 왕도 귀족도 아닌 평범한 은수자였다. 그는 순례자들이 늪지와 강을 건너다 목숨을 잃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오직 순례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 다리와 길을 닦고(Calzada), 병원과 숙소를 지었다. 우리가 지금 이 길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천 년 전 이 성인의 헌신 덕분이었다. 나는 순례길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성인의 도시에 발을 들인 것이다.



5) "이 닭이 울지 않는 한, 네 아들은 살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 도시를 까미노 최고의 스타로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기적의 닭' 전설이다.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도시의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에 들어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성당 한쪽 벽면에, 놀랍게도 **살아있는 닭 두 마리(흰 수탉과 암탉)**가 횃대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 닭들은 까미노 최고의 전설을 증언하고 있었다.

gallienero-1-1024x914.jpg Cath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아주 오래전, 젊은 순례자(혹은 그의 부모)가 이 마을을 지나다 여관 주인의 모함을 받아 도둑으로 몰려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슬픔에 잠긴 부모가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들의 시신이라도 거두려 교수대를 찾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들은 밧줄에 매달린 채 살아있었다! 아들은 "성 야고보(산티아고)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라고 말했다.


u9536416733_A_medieval_Spanish_village_at_twiligh.png 생성형 AI Image



부모는 기적을 알리려 마을 판사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판사는 막 저녁 식사로 통구이 닭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는 부모의 말을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 내 접시 위의 이 '통구이 닭'이 다시 살아나 우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소리군!"


a_rustic_medieval_tavern_a_Spanish_judge.png 생성형 AI Image



바로 그 순간, 접시 위에 있던 통구이 닭이 갑자기 깃털이 돋아나며 살아나, 큰 소리로 "꼬끼오!" 하고 울기 시작했다.


판사는 기적에 경악하며 무고한 순례자를 풀어주었고, 그날 이후 이 성당은 기적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있는 닭을 키우게 되었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통구이 닭이 울었던 그곳(Donde cantó la gallina después de asada)."


나는 성당 안에서 울려 퍼지는 닭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 현대의 유령 도시, 그리고 성당 안의 살아있는 닭까지... 불과 하루 동안 겪은 이 모든 일이 과연 현실인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 길은, 내 상상력의 한계를 매일같이 시험하고 있었다.



20170930_184014.jpg LA에서 오신 교민분이 요리해 준 저녁 성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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