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12)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12. 메세타, 메세타! - 그 황홀한 고독 (1)

: 까미노 제11일 차(Santo Domingo de la Calzada to Tosantos, 27.1 km; Oct. 1, 2017)



1) 닭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산토 도밍고에서의 11일 차 아침, 어제 마주한, 1000년의 헌신(성인 도밍고)과 기묘한 기적(통구이 닭)과 현대의 폐허(시루에냐)가 뒤섞인 그 도시는, 이제 안갯속의 전설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벨로라도(Belorado) 혹은 발이 허락하면 토산토스(Tosantos)까지, 약 23~27km의 거리. 하지만 이 길은 단순한 23km가 아니었다. 오늘은 마침내, 라 리오하의 붉은 포도밭이 끝나고, 순례자들이 '지옥'이자 '천국'이라 부르는 바로 그곳, 메세타(Meseta) 평원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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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녕, 라 리오하! (Adios, La Rioja!)


길은 '순례길의 아버지'가 닦은 도시를 벗어나, 라 리오하의 마지막 마을인 그라뇽(Grañón)으로 향했다. '기적의 닭' 마을과는 대조적으로, 그라뇽은 흙냄새가 나는 순박하고 조용한 중세 마을이었다. 이곳 성당 종탑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이 순례자들의 로망이라지만, 나는 그저 마을 입구에서 커피 한 잔으로 이 땅의 마지막 공기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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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라뇽을 벗어나자마자, 길은 나를 거대한 표지판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Junta de Castilla y Le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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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카스티야 이 레온. 8일 차에 나바라를 떠나며 만났던 '와인의 땅' 라 리오하가 3일 만에 끝나고, 스페인의 심장부이자 가장 거대한 주인 '카스티야 이 레온'에 들어선 것이다.


3) 200km의 고독, 메세타가 열리다


표지판을 통과하는 순간, 풍경이 칼로 자른 듯 바뀌었다. 방금까지 나를 감싸던 포도밭과 작은 언덕들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그저 하늘과 땅만이 존재했다.


이것이 메세타였다. 끝없이 펼쳐진,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 그 위로 구름만 낮게 깔려있고, 길은 자로 잰 듯 지평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앞으로 200km 동안, 나는 이 거대하고 텅 빈 고독 속을 걸어야만 한다. 그늘도, 마을도, 변화도 없는 길. 이곳에서 순례자는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의 그림자만을 동반한 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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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대평원 메세타(Meseta Plateau)>

스페인 국토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한 메세타 평원, 해발 400에서 1000m의 고지대이다. 곡식과 작물들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여름 수확기기 지나면 그 넓은 평원은 메마른 황토색의 텅 빈 공간이 된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지평선뿐인 이 평원에서는 아주 띄엄띄엄 있는 작은 마을 이외에는 가도 가도 제대로 된 나무그늘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여름에는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겨울에는 혹독하게 추운 곳이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은 아주 먼 곳에 있는 물체까지 또렷하게 보이게 만드는 동시에 눈으로 느끼는 거리감은 훨씬 더 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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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와 엘시드의 땅>

산티아고 까미노길은 메세타 센트럴의 북부에 해당하는 리오하(Rioja), 까스띠야(Castilla), 레온(Leon) 지방을 지나게 된다. 메세타는 세르반테스의 유명 소설 속 주인공 돈키호테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면서 특히 까스띠야는 스페인의 민족영웅 엘시드(El Cid)의 고향이기도 한데,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셋(Ortega y Gasset)이 말한 대로 ‘스페인 역사의 한가운데 있고 그 중심’이기도 하다.


메세타 대륙이 차지하고 있는 바로 이런 중심성에서 오늘날 스페인의 두 큰 도시 마드리드(중심)와 바르셀로나(주변) 간의 반목과 경쟁의 역사적 시원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4)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텅 빈 공간. 이 평원에서는 모든 것이 작게 보인다. ‘나’ 하나는 더 쪼그라든다. 위에도 텅 빈 하늘, 아래도 텅 빈 땅.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지렁이 같이 늘어진 길. 저 앞에 아득히 보이는 순례자와 나의 거리가 한 십리는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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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그냥 걷는다'. 오직 한 침 한 침 흘러가는 시간만이 나의 동행자이며 위로자다. 머리 텅 비우고 기계처럼 계속 걷다 보면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시간이 얼마쯤 흘러간 후에는 오늘 내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착해 있겠지.


존재(Zein)와 시간(Zeit)의 싸움에서 여기에서는 항상 시간이 우위이다. 존재가 자기를 부정하고 싶은 힘든 순간들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


20171001_141342.jpg 아침에 미리 준비해 온 바게트샌드위치로 오후 점심식사 - 역시 재주 많은 LA 교민분의 솜씨




20171001_095110_Edited.jpg 만나고 헤어지고 10일 이상을 함깨 동행했던 LA 교민분들, 지금도 잘 살고 계시리라


5) 메세타의 첫 관문, 벨로라도


몇 시간을 텅 빈 길 위에서 바람 소리만 들으며 걸었을까. 저 멀리 오늘의 목적지인 벨로라도(Belorado)가 보이기 시작했다.


메세타 평원의 첫 번째 오아시스인 벨로라도는 'Bienvenidos(환영합니다)'라는 거대한 표지판으로 지친 순례자를 맞이했다. 이 도시는 중세 시대 국경의 요새 도시답게 튼튼해 보였지만, 동시에 마을 곳곳의 화려한 그래피티(벽화) 들이 이 삭막한 평원 한복판에서 마지막 창의성을 뽐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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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을 조금 쉽게 하기 위해 내친김에 토산토스까지, 좋은 동행들에 묻혀 더 걷게 되었다. 오후 늦게 나는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내일부터 시작될 진짜 고행을 준비했다. 비상식량으로 챙겨 온 비프 저키(에너지 보충)와 미네랄 보충을 위한 다시마 조각을 다시 점검했다. 이제부터는 생존이다.


11일 차, 나는 오늘 약 27km를 걸었지만, 마음은 이미 200km의 고독한 평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첫출발부터 지금까지 270km를 걸어왔지만, 진짜 까미노는 바로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20171001_193346.jpg 고투 끝의 달콤한 보상, 자녁식사 - 훌륭하지 아니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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