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추억에(24)

: 고통스러웠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by 디본


24. 메세타 평원을 지나 레온의 언덕으로(1)

:까미노 제23일 차(San Martín del Camino to Astorga), 24.0km; Oct. 13, 2017)지만 행복했던 순례의 기록

까미노 여정 제23일 차(10월 13일)는 지루했던 메세타 평원과 작별하고, 곧 다가올 산악 지대(레온 산맥)를 예고하는 '풍경의 전환점'이 되는 날이었다. 또한, 순례길 위에서 가장 낭만적인 '다리'와 동화 같은 '가우디의 건축물'을 만나는 시각적인 호강의 날이기도 하였다. 헤아려 보니 지금까지 상당히 많이 걸었다. 이제 Santiago de Compostella 까지는 약 280km 정도 남았으니 약 500km 이상을 걸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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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의 다리, 오르비고를 건너다 (Puente de Órbigo)


오늘은 10월 13일 금요일. 산 마르틴의 아침은 차분했다. 마을을 벗어나 1시간 남짓 걸었을까, 단조로운 풍경 사이로 갑자기 영화 세트장 같은 거대한 다리가 나타났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 마을의 상징, 오르비고 다리다. 로마 시대의 흔적 위에 중세에 지어진 이 긴 다리는 까미노에서 가장 아름답고 긴 다리 중 하나라고 한다.


이곳엔 낭만적인 전설이 서려 있었다. "1434년, '돈 수에로'라는 기사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이 다리를 지나는 기사들에게 결투를 신청해 300개의 창을 부러뜨릴 때까지 싸웠다." 이른바 '명예의 통행(Passo Honroso)'.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다리 위를 걸으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중세 기사의 뜨거운 심장을 상상해 본다. 내 발바닥의 통증쯤이야, 그들의 결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hospital-orbigo-puente-paso-honroso-camino-frances-1200x600.jpg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 다리



2) 굿바이 메세타! 붉은 땅과 언덕의 등장


다리를 건너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나는 도로변을 피하기 위해 오른쪽의 한적한 시골길을 택했다.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Villares de Órbigo)와 산티바녜스(Santibáñez)를 지나는 길. 풍경이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평선만 보이던 평야는 사라지고, 붉은 흙과 초록색 관목들이 어우러진 완만한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이제 정말 메세타가 끝났구나."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레온 산맥(Montes de León)의 실루엣이 가슴을 뛰게 했다. 지루함과의 싸움은 끝났고, 이제 다시 자연의 다채로움을 즐길 시간이다.


3) 언덕 위에서 마주한 '성벽 도시'


아스토르가 직전, 산 호스토 데 라 베가(San Justo de la Vega) 마을을 지나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de Santo Toribio)' 언덕에 올랐다.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언덕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아스토르가(Astorga)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로마 시대부터 요새였던 도시. 마치 순례자를 기다리는 '약속의 땅'처럼 보였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성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진입하는 듯한 전율이 흘렀다.


Crucero-de-Santo-Toribio-San-Justo-de-la-Vega-Camino-de-Santiago-Frances_3.jpg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Cruceiro de Santo Toribio)'



4) 아스토르가: 가우디와 '주교의 궁전'


아스토르가 대성당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엄숙한 대성당 바로 옆에 디즈니 만화에나 나올법한 건물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주교의 궁전(Palacio Episcopal)'. 그는 바르셀로나가 아닌 이곳 순례길 위에 동화 속 성을 지어놓았다. 회색 화강암과 붉은색 지붕, 둥근 탑과 뾰족한 창문들. 레온의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가 단단한 요새 같았다면, 이곳은 순례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마법의 성 같았다. 며칠간 흙길만 보며 메말랐던 감성이 가우디의 곡선 앞에서 되살아났다. 스페인 내에서 카탈루냐 지방(바르셀로나 주변)을 제외하고 가우디의 건물이 있는 곳은 레온, 아스토르가, 코미야스(Comillas) 딱 세 곳뿐이다. 그중 두 곳(레온, 아스토르가)을 이틀 연속으로 보게 된 셈이다.



Palacio_Episcopal_Astorga_2021_-_exterior.jpg 주교의 궁전(Palacio Episcopal)


5) 달콤한 위로, 초콜릿과 코시도


아스토르가는 로마 시대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Asturica Augusta)'라고 불리던 중요 거점이었고 그래서 도시 곳곳에 로마 목욕탕 유적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스토르가는 눈만 즐거운 곳이 아니다. 이곳은 스페인 최초로 초콜릿이 만들어진 '초콜릿의 도시'다. 당이 떨어진 오후, 진한 수제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무니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저녁에는 이 지역(마라가테리아)의 전통 음식인 '코시도 마라가토(Cocido Maragato)'에 도전했다. 고기(족발, 소시지 등)를 먼저 먹고, 콩(병아리콩)을 먹은 뒤, 마지막에 수프를 마시는 독특한 '거꾸로 식사법'. 든든하다 못해 배가 터질 것 같은 포만감이 족저근막염의 시름조차 잊게 했다.


메세타의 끝자락, 가우디의 동화, 그리고 달콤한 초콜릿까지. 오늘은 몸은 고단해도 오감(五感)이 충만했던 축복 같은 하루였다.


camino-frances-pueblos-astorga.jpg Astor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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